[IRON MAN] 남자는 철들지 않는다. 현실에 찌들어갈 뿐이다.
/ 원본 :htp://movie.naver.com/movie/board/review/read.nhn?st=code&sword=44885&od=goodcnt&nid=1313667
quirkus님의 리뷰 스크랩 입니다 /
로봇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는 나이를 먹어도 영웅과 메카닉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몇 시간째 쭈그리고 앉아서 건프라를 신나게 만들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그게 다 뭐 하는 거냐고 하시더군요. 언제나 남자들에 대한 여자들의 핀잔은 철 좀 들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언맨을 보러 갔어요. 온몸에 잔뜩 철을 든. 한마디 평을 원하시는 분께는 '시원하게 보기 좋은 영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면 이 밑은 넘어가 주세요.
1. 영웅
시
쳇말로 10대에는 싸움 잘하는 놈이 짱이고, 20대에는 좋은 대학 다니는 놈이 뽀대나고, 30대부터는 돈 많은 놈이 무적이라고
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40대인데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췄습니다.(물론 싸움은 그 자신의 완력이라기보다는
수트의 힘이지만.) 최근 몇몇 수퍼히어로 영화에서 보여지는 영웅의 축소화 현상과 견주어보면 이러한 완벽맨의 설정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듯 보입니다. 보통 너무 완벽한 인물 앞에선 멋지다는 칭찬보다는 너 잘났다는 비꼼이 먼저 나오게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달리 보면 그는 작은 영웅 맞습니다. 적어도 그는 신체적으로는 비범할 게 없거든요. 아이언맨이 돈이 많거나 공부를 잘해서 영웅인
건 아니잖아요. 아이언맨을 아이언맨으로 만들어주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는 평범하다는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펑범보다
못할 수도 있겠어요. 가슴에 뭔가 번쩍거리는 걸 달고 다니니 폼은 나는데, 그게 알고보면 그가 '산 송장'이기 때문에, 몸속에
돌아다니는 파편에 다치지 않기 위해, 요컨대 다 살자고 달아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 이언맨을 편드는 것 같다구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돈 많고 똑똑하고 쌈까지 잘함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수트의 면상이 저렇게 생겨먹었음에도 저는 왠지 그에게 정이 갑니다. 그건 그의 재치때문이에요. 블록버스터 치고는 캐릭터에 정성을 들였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말해볼게요. 그는 자기한테 닥친 믿을 수 없는 일에 대해 헉 하고 놀라지 않습니다. 감정 오버해서 탄성을 연발하지 않습니다. 닥친 사태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비운의 복수심으로 가득 차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까봐 노심초사하거나 정체성의 분열을 겪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편안하고 밝습니다. 거기에 목표를 향한 고집과 집중까지 있으니 맥심모델 12명이 넘어갈 수 밖에요.
보시다시피 나는 멋지고 잘난 놈입니다
그
가 저런 성격을 가질 수 있는 데 적잖이 이바지하는 것이 바로 그에게 가족이 없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토니 스타크와 함께
동굴에 갇혔던 과학자는 가족이 없다는 그의 말에 '모든 걸 다 가졌지만 가장 중요한 걸 못 가졌군요'라고 말합니다.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카피에 비춰본다면, 그때의 스타크는 아직 영웅으로 거듭나기 이전이니까, 저 대사가 표면적인 뜻 이외에 뭔가
반어를 담고 있다고 보이진 않아요. 모든 헐리웃 영화가 가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입을 모아 긍정합니다만, 수퍼히어로에게 가족은
양날의 검같은 존재입니다. 영웅의 식구들은, 그저 잡혀가는 게 일입니다. 딸이 잡혀갔다는 사실은 람보(혹은 가일)의 폭력에
이유를 제시해주고, 그로하여금 두 배의 힘을 내게 해주겠지만, 동시에 그는 그것때문에 흥분하게 되고, 적이 딸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댈 경우엔 무기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2. 명분
블 록버스터는 보고 연구하고, 음미하며 인생을 되돌아보라고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묻습니다. 쟤네들 왜 싸워? 여기에 대해 얼마나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주느냐에 따라 그 영화의 유치성 정도가 판가름납니다. SF에서 종종 등장하는 전문과학분야의 지식은 관객들을 똑똑하게 만들어주기보다는 그들의 냉철한 판단력을 흐리는 데 소임이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과학적 사실성은 유치성 정도와 그다지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액체형상기억금속이 외계 로봇보다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터미네이터2>는 보통 <트랜스포머>보다 작품성이 높다고 평가되죠. 역시 명분인 겁니다. T800은 T1000을 제거해야한다는 아주 구체적인 소명이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트랜스포머>의 전투 이유는 '공이 그쪽으로 굴러가서 말인데, 거기 가서 축구 좀 마저 하면 안되겠니?'쯤 될까요. (오해는 없었으면 합니다. 저 또한 입을 벌리고 <트랜스포머>를 봤던 한 사람으로, 그런 영화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도 긍정합니다.)
아 이언맨의 경우 명분에 대해 점수를 메기자면 10점 만점에 6.5정도 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약하다고 느낀 부분이에요. 테러단의 소굴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 나오니, 자신이 만든 무기에 얻어맞는 사람들의 처지에 눈을 떠서, 이제부터는 양심에 따라 오직 세계평화를 위해 살기로 했다. 일단 여기까지만도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였던 시절의 반공독후감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큰 빈틈은 그런 의지의 표현이 왜 하필 MK-2의 제작을 통해서 이루어져야하는가에 있습니다. 성급하게 그의 행위에 숭고함을 입히려 들지 말고 일단 가볍게 나갔으면 어땠을까요. 가령, 한 번 만들어보니 쓸만하더라. 맛들였다. 이정도의 이유만으로도 그런 캐릭터가 MK-2를 추진케 하는 데는 별 무리 없을 겁니다.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그 이후에 다른 계기를 통해서도 가능했을 거구요.
"지켜야할 사람이 없는데 왜 목숨을 걸고 싸우죠?" "그러면 안 돼?" "그건 부자연스런 일이에요."
<건담>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재치만점의 스타크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우리의 외로운 아이언맨.
거
시적으로 봐도 조밀하지는 않습니다. 테러집단 우두머리로 나오는 대머리 녀석, 어딘가 <미이라>의 이모텝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에 저 녀석 한딱가리 하겠구나 했더니 '첨단의 힘'에 맥없이 무너지더군요. (대빵은 그 대머리가 아니라 딴 대머리입디다.)
그런데 테러집단이란 작자들이요, 원래 그렇게 약자를 상대로 새로 구입한 무기 성능이나 시험해보는 양아치들이었나요? 영화에 나오는
그 불쌍한 테러집단에게선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목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미국을 닮은 지배욕과 그에 너무 못미치는
기술력이 있을 뿐입니다. 약탈해봤자 소 한마리나 건질까 싶은 조용한 작은 마을을 미사일까지 써서 공격할 건 뭐래요. 돈이 많은
겁니까.
3. 액션
포즈 좋고 다 좋은데 그 얼굴은 좀 어떻게....
역 시 이 영화는 액션에 대해 말해야겠죠. 일단 양적인 면에서는 약간 부족하다 싶은 느낌인데 그걸 갖고 트집잡을 생각은 없고, 그저 감질 나는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질적으로는 글쎄요, 매카닉이 깔끔하고 동작이 그리 복잡하지 않아서 저처럼 눈이 느린 사람들이 보기엔 편안한데, 박력이나 속도감, 비쥬얼 적인 면에서는 <트랜스포머>에 못 미쳐요. 그러나 관객이 수트의 제작과정을 볼 수 있어서 그런지 감정이입은 잘 됩니다. 얘기를 꺼내긴 했는데, 액션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네요. 눈에 직접 보이는 것 외에 무슨 말을 덧붙이겠어요.
이것이 진정한 PG
4. 영웅은 태어나지 않는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컷입니다. 장인다운 포스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 카피에 대해서는 너무 심오하게 해석하지 말고 가급적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영웅은 정말로 위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망치질과 담금질을 통해서 '만들어'지거든요. <아이언맨>의 가장 큰 몰입요소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어요. 굳이 건프라 조이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렸을 때 두꺼비집, 찰흙인형, 수수깡집, 레고블럭, 새총 따위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만들어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행위만이 줄 수 있는 집중과 희열을 기억할 것입니다. 완성품을 내고, 업그레이드 버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한 디테일 없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아이언맨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였다면 재미는 반감됐을 거예요. 뭔가 만들어간다는 건 (내 수중에 스타크와 같은 기술력과 자본력이 없다는 것이 아무리 분명해도) 내게 무슨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나길 손놓고 기다리는 일과는 같지 않으니까요.
영화를 보기 전에 같이 보러 간 친구와 약속했어요. 영화 보고 나와서 절대 따라하기 없기. 그런데 이거 미안하게 됐는데요. 종이비행기라도 만들러 가야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