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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녀의 LIfe/싱글녀의 문화생활

서태지 8집 표절? 에 대한 비평


<[모아이평론]서태지 표절은 없다! - 서태지에 관한 무서운 편견들 >라는 제목으로 '문월'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을 너무 잘 쓰셔서.. 스크랩하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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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한겨레21 문화/과학 분야에 실린 대중음악평론가 차우진님의 서태지에 관한 비평글입니다. 원문 주소는
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8/08/021015000200808070722031.html 입니다. 필자는 해당 기사를 접하고서 문화생산자(서태지)보다 문화비평가의 사회적 의무가 더 크다고 느꼈습니다. 잘못된 대중음악비평은 해당 뮤지션 뿐만 아니라, 평단 자체의 질적 저하를 초래할 수 있고, 그렇게되면 올바른 비평문화가 사라져 결국 문화의 현상을 바람직하게 측정하고 진단할 수 없게 될 것이기때문입니다.  필자는 해당 기사를 그대로 유지하고 그 하단에 필자의 비평을 담을 계획이었으나, 블로그에 담기에는 원문비평글(차우진님의 서태지에 대한 비평글)과 필자(본인)의 더해진 비평글의 내용이 길다는 판단하에 해당 원문에 직접 필자의 비평을 삽입하기로 했습니다. 원문과의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해, 필자의 비평글은 흰색으로 작성했으며, 원문의 글은 밑줄을 그어두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시작해 볼까요? 


<2008년 8월 7일 한겨레21에 기고된 차우진님의 기사내용>

  음악보다 서태지가 보인다.

선주문만 20만 장 넘긴 싱글 <아토모스 파트 모아이>, 이 노련한 앨범은 왜 흥미롭지 않은가 [비평1] 차우진님께서는 이번 서태지의 싱글이 음악성은 없고 음악외적으로만 주목받는 서태지이기때문에 흥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차우진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이제부터 필자가 증명해보이겠습니다. 

▣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

7월29일, 서태지의 새 앨범이 발매되었다. 정확히 말해 ‘앨범’은 아니다. 서태지는 솔로 4집 앨범 <아토모스>를 발표하기 전 두 장의 싱글을 먼저 발표하겠다고 공언했는데, 이번에 발매된 음반은 그 첫 번째 싱글이다. <아토모스 파트 모아이>란 제목 아래 리믹스 트랙을 포함해 4곡이 실렸다.

유일한 대안? 흠 좀 무서운데…


△ 서태지의 새 싱글은 곳곳에 전자음이 삽입됐지만 수록된 3곡 중 장르적으로 신스팝이나 일렉트로니카에 속할 정도로 곡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트랙은 없다. 8월1일 오후 코엑스 광장에서 열린 ‘서태지 게릴라 콘서트’에서 서태지가 열창 중에 팬들의 환호를 듣고 있다.

발매되기 전부터 이 음반은 뜨거운 감자였다. 실제로 선주문만 20만 장을 넘겼다고 하고, 발매 당일 판매 기록을 깼다는 소식도 들린다. 앞으로 발매될 정규 앨범이 침체된 음반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으리라는 기대가 은연중 작동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환상이다. 서태지 개인의 성과가 음반시장의 오래된 불황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환상.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몰이해와 지금까지 확대재생산된 서태지라는 아이콘의 신화화 덕분이다. 그런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서태지가 ‘한국 대중문화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그런데 이런 개념이야말로 ‘흠 좀 무서운데…’란 생각이 들게 한다. [비평2] 서태지가 침체된 한국대중음악시장의 유일한 대안이라면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서태지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누가 말했습니까?  누가 서태지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했는지 먼저 밝혀주신 후, 이런 무서운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서태지나 서태지 팬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는 말로 오해받을 수 있으며, 그런 오해는 곧 반감으로 이어질테고, 결국 차우진님이 그토록 중점을 두시는 객관적인 음악성보다는 감정적으로 서태지를 평가하게 될 소지가 크기때문입니다.영웅주의에 대한 동경은 사회 전반에 걸쳐 엘리트주의를 합리화시킬 뿐 아니라 대중문화와 역사 발전의 맥락에 대한 왜곡을 낳기 때문이다. [비평3] 영웅주의가 엘리트주의를 합리화 시킨다면 영웅의 주체가 엘리트라는 말인데요. 그럼 차우진님의 논리대로 서태지가 엘리트라는 공식이 성립합니다. 그런데말이죠, 왜 서태지가 엘리트입니까? 필자가 보기에는 대중음악평론가들에게서 더욱 엘리트적 기질이 짙게 풍겨나거든요. 객관적인 엘리트주의와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주관적인 엘리트주의를 구분해서 사용해 보시는 것도 상당히 진보적인 마인드라고 느껴집니다.

흥미로운 건 아직도 서태지에 대한 비판과 지지 담론들이 몇 년 동안 그대로라는 점이다. 1990년대 한국 청년문화·하위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배경에 1992년에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을 역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일종의 스위치였을 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문화의 생산자들은 모두 ‘스위치’ 구실을 할 따름이다. 변화와 혁신을 이끌거나 말거나 주체는 언제나 대중문화의 수용자들이었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비평4]대중문화의 생산자는 단순하게 '스위치'일 뿐이고 대중문화의 주체는 수용자라는 말 어디서 많으 듣던 내용인데요.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죠. 일단 스위치라는 개념부터 밝히시던가, 아니면 알기쉽게 풀어쓰시던가, 이 비평을 읽는 수용자(문화소비자,대중)들중 스위치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부정확한 표현은요, 그냥 일기장에나 끄적거리는 거에요. 스위치란 점화장치를 말씀하시는거죠. 쉽게말해 가수가 신곡을 내는 것은 방(=문화현상)에 불을 키는 행위일뿐이고 불켜진 방안에서 고스톱을 치건, 텔레비를 보건, 그건 문화소비자(수용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스위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일 뿐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대중문화평론가들은 과연 목적에 속할까요? 수단에 속할까요? 차우진님은 대중문화의 주체가 분명 수용자(소비자=대중)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중음악평론(문화평론)도 수단이죠. 대중문화의 주체인 수용자(일반대중)들이 효율적이고 질높은 문화소비활동을 돕는 것이 바로 문화평론이기때문입니다. 필자의 이런 논리에 틀림이 있습니까?  따라서 차우진님 논리 그대로 가지고가면요, 대중음악평론가 역시 '스위치'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설마 대중음악평론가들이 주말에 극장에도 가고 좋아하는 음반을 사서 듣기도 한다는 이유로 소비자에 속한다고 생각하시는건 아니겠죠? 문화생산자(뮤지션)들도 영화도 보고 다른 뮤지션의 음반도 사니까요. 문화는 말이죠, 생산자-유통자-소비자(자본논리로 구분했을때)가 교류하면서  발생하는 유기적인 현상입니다. 문화의 주체가 늘 대중(소비자)이라면 문화생산자(창작자)와 문화유통자(평론)들이 문화발전과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현실적인 부분은 어디로 감추시려구요? 제발 부탁인데 자신의 논리를 관철시키기위한 논리를 위한 논리를 강조하지 맙시다. 문제는 90년대 초반 연구자들이 이뤄놓은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비평적 성과들을 곡해하면서 서태지 개인을 음악적·문화적·사회적 이슈들과 결합시킨 미디어, 이를 마케팅 포인트로 적극 활용한 서태지 ‘측’의 전략이다. 서태지에 대한 평가가 음악보다 문화적 영향에 맞춰진 것은 그 때문이다. [비평5] 상당히 전문가다운 양심을 고수하고 계신 차진우님이라고 느낀 부분입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필자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우진님께서 결정적으로 실수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90년대 초반의 비평적 성과가 지금의 몰가치적 성과보다 가치있다는 선입관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 가치있는 90년대 초반의 비평적 성과는 바로 한국대중음악의 르레상스시기라고 일컬어지는 90년대 초반의 시기와 일치됩니다. 그렇다면 한국대중음악 생산자들이 양질의 사운드를 창출하지 못했다면 그 잘난 대중문화에 대한 비평적 성과라는 것은 없었겠죠. 지금처럼 말이에요. 혹시 대중문화에 대한 양질의 비평 덕분에 문화생산자들이 자극받아 좋은 음악을 생산했다고 보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90년대초만 못하다고 차우진님 스스로 인정한 지금의 수준낮은 대중음악을 양질의 비평을 통해서 90년대 초보다 수준높게 끌어 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것은 평론가로써 스스로 지금의 평론 수준이 90년대 초만 못하다고 인정하신다는 말씀이시거나 아니면 대중음악비평이 문화생산자에게 종속되어 이루어지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신다는 말씀뿐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본주의(그것이 천박하거나 숭고하거나 상관없이)시스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뮤지션의 마케팅/자본적 전략을 지금와서 부인한다면 비대해진 자본주의 시스템을 전면 부인하는 꼴이 된다는 생각은 아직 안해보신 것 같군요. 문화생산자가 공연을 하고 전시를 하고 음반을 내는 행위를 어떻게 비전략적으로 할 수 있는지 필자는 모르겠고, 뮤지션의 행보는 문화 그 자체가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뮤지션인 마이클 잭슨과 성형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의 성형에 수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을까요? 가수인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그녀의 이혼이 무슨 연관이 있기에 그 많은 대중들이 그것에 호기심을 느꼈을까요?  차우진님! 진정으로 대중문화의 주체가 수용자(소비자,일반대중)라고 생각하는 것은 맞긴 맞나요? 제가 볼때 차우진님은 대중을 우중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서 여쭤보는 말입니다. 대중이 스타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리고 스타는 그런 관심을 전략적으로 이용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니까요. 이건 문제 삼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서태지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생산자들은 자신의 문화생산물을 대중들에게 어필하기위해 수많은 자본적 전략을 연구,사용하고 있습니다. 서태지에게만 그것을 불허한다면 형평성의 문제로 번져지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겠죠. 따라서 이부분은 원론적으로는 타당한 말이지만, 현실적으로 봤을때 전혀 동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북한에서 활동하는 가수가 아니라면 말이죠, 최소한 그들의 자본적 전략전술(상술)도 인정해줘야 합니다. 이미 우리사회는 자본적 시스템을 발동시키지 않고서 차현우님이 말씀하시는 순수한 음악적 재료만 가지고 대중들과 소통하기는 불가능한 사회니까요.
서태지를 숭배하거나 경멸하는 사람들도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뿐더러 종종 그의 결과물은 필요 이상 과장된 채로 평가받았다.[비평6] 분명 서태지의 음악이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평가받아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비틀즈에 관해서는 순수한 음악적 지식의 범주안에서 그 평가가 적절했다고 보십니까?  한때 사람들이 비틀즈에 열광했을때, 비틀즈에 열광한 대중들은 음악성보다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동경적인 측면이 강했다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대중음악의 음악적 가치가 순수한 음악성에만 있다고 보신다면 지금까지 대중음악평론가로써 정신적으로 너무도 힘든길을 걸어오셨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봅니다. 그리고 차우진님께서 표현하신  필요 이상의 기준이란게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서태지라는 문화생산자가 만들어 내는 음악적 값어치가 서태지가 받는 대접보다 못하다는 주장이시라면 그 음악적 가치의 기준 설정은 누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정할 수 있을까요?  혹시 대중음악평론가들은 그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음악성이 높은 음악은 높은 대접을 해주고, 음악성이 낮은 음악은 낮은 대접을 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음악성의 수준을  측정하는 정교한 잣대라도 가지고 계신다면 말이죠. 특정 대중문화물을 값어치를 측정할 도구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아무런 기준과 근거도 없이 무턱대고 서태지가 과장된 평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상당히 빈약합니다. 서태지가 그의 음악적 결과물보다 과장된 평가를 받았다고 주장하시려거든 그에 합당한 명확한 근거도 함께 제시되어야 합니다. 아무 근거도 없이 주장만 하는건 아마추어적 신변잡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음악적으로 서태지는 그리 흥미로운 텍스트가 아니다. 사운드가 세련되고 깔끔하게 들린다는 것은 평가라고 하기엔 민망하다. 사운드의 질은 주로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좋은 장비와 좋은 녹음실, 좋은 엔지니어가 좋은 사운드를 만든다. 게다가 음질은 음반의 기본 요소다. 결국 ‘좋은 사운드’라는 건 자본과 숙련도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평가는 사운드를 만들어낸 맥락을 추적하는 과정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기술적 배경 외에 사회문화적 관점이 허용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서태지의 음악은 서태지라는 개인보다 흥미로운 텍스트가 아니다.[비평7] 서태지의 사운드를 기술 외적인 평가, 즉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그닥 훌륭한 사운드가 아니다라는 말씀이신데요, 뮤지션이 작업한 음반을 어떻게하면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감상할 수 있을까요? 혹시 좋은 음반은 진지한 사회문화적인 이슈들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리고 사운드를 만들어낸 맥락을 추적하는 과정으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말은 또 무슨 뜻입니까? 차우진님이 구사하는 단어는 하나도 안어려운데, 글의 기본적인 논리가 너무 엉성해서 필자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대중음악이 그 사회의 의식적인 문제에 개입해야 할 절대적인 의무는 그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중음악이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가치가 있어야 하는 이유와 기술과 숙련도, 자본으로 결정되는 사운드의 질이 음반  평가에서 수렴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에 관해서도 여전히 근거가 없습니다. 주장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타인에게 설득시키는 것이 어렵죠. 지금처럼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신의 주장만 일삼고, 무근거의 틈을 현학적인 집필(그다지 현학적이지도 않다고 필자는 생각하지만)로 매꾸려한다면,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필자는 음악은 감흥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의 뜻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감흥이 없는 사운드는 제 아무리 사회문화적 맥락(이것이 도데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속에서 가치있어도 음악으로써의 자격은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감동과 흥겨움을 주기 위해서는 사운드의 질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확고부동한 입장입니다. 그 근거 역시 아주 간단합니다. 음악은 음(音)악이기 때문겠죠. 사회문화적 맥락속에서 감흥을 찾는게 음악이 아니라 사운드(소리,音)에서 그것을 찾는 것이 바로 음악이니까요. 그래서 음악은 음학(學)이 아니라 음악(樂)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이번 싱글도 마찬가지다. 싱글 커버가 시규어 로스의 99년 앨범 〈Agaetis Byrjun〉의 커버와 유사하고,[비평8] 수록곡 중 <틱택>(T’IKT’AK)은 시규어 로스의 2005년 앨범 제목 〈TAKK...〉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일찌감치 논란을 낳았기 때문이다. 서태지 본인이 ‘네이처 파운드’라는 장르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팬들이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할 것’이라며 발매 전부터 기대를 증폭시켰음에도 이 싱글은 흥미롭지 않다. [비평8] 차우진님은 진짜 무서운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 같습니다. 바로 이런 말들이 정말로 무서운 말입니다. 아무래도 차우진님께서도 서태지님이 시규어 로스를 표절했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물론 차우진님은 그냥 표절 논란이 일고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 뿐이라고 말씀하시겠죠. 하지만 차우진님의 글의 행간의 의미를 읽으면 누가봐도 차우진님은 서태지님이 시규어 로스를 표절했다고 여긴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차우진님이나 서태지가 시규어 로스를 표절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필자는 서태지가 이번 앨범에서 시규어 로스를 표절하지 않았다라는 주장을 펼칠 것이고, 또 그 주장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 하겠습니다. 서태지가 시규어 로스를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근거로 삼는 시규어 로스의 99년 앨범 자켓05년 앨범 제목 TAkk..은 그 근거가 너무나 빈약해서 유치하기까지 하더군요. 어떻게 하면 그런 말도 안돼는 주장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한 뮤지션을 구석으로 몰고갈 수 있는지 필자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

우선 시규어 로스의 95년도 앨범 제목을 표절했다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지에 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노래 제목가지고 표절 논란이 있다는 자체가 참으로 신기할 뿐입니다. 그리고 노래 제목 따위나 가지고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상황이 필자는 너무나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Electronica - Masquerade(2000.09.05)
11번 트랙 - Tik Tok

Lee - All So Clear(2003.08.26)
5번트랙-Tik Tock

Depeche Mode - Dmbx4 (Part 2)(2004.11.03)
18번트랙 Enjoy The Silence - Ricki Tik Tik Mix

Bionik Phunk - Tik Tok ( 2005.01.01)
1.2.3번 트랙 - Tik Tok

Janinto - JanintoII( 2007.07.03)
12번트랙- Tik Tat 

위의 곡들은 모두 노래나 앨범명이 엇비슷하거나 동일한 것들입니다. 찾아보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엇비슷한 곡들이 존재합니다.  위의 근거를 기준으로 본다면 시규어 로스도 2005년이전에 발표된 앨범이나 곡들을 표절한 것입니다. 그럼 시규어 로스가 과연 누구의 것을 표절했을까요? T'ik T'ak과 Takk..이 유사하다면 Takk..과  Tik Tok도 유사하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T'ik T'ak이 Takk..을 표절했다면 Takk..도 Tik Tok을 표절했다고 봐야 논리적으로 옳습니다. 왜요? Tak와 Takk..는 유사하지만, Takk..와 Tok는 전혀 다른가요? 말씀좀 해보세요. 막 해깔리나요? 좀더 쉬운 것으로 제시해 드릴까요?

Jason Rebello - Keeping Time(1993. 03. 27)
12번 트랙 - Tic Toc

Wild Orchid - Wild Orchid
7 번 트랙 - Tic Toc

Smile - Smile(1999.03.01)
?번 트랙 - Tic Toc

Klea - Tic Toc(Remix)(2002.08.06)
1~7번 트랙 - Tic Toc

Zazie-Rodeo(2005.03.29)
4번 트랙 - Toc Toc Toc

Pat C. - One Sweet Day(2005.08.25)
1번 트랙 - Toc Toc

Gianni Bella - Gianni Bella(2005)
9번 트랙 - Toc Toc

In-Grid - Voila(2005.11.22)
4번 트랙 - Tic Toc

Cultured Pearls - Tic Toc
1.2.4번 트랙 - Tic Toc

T'ikT'ak이 Takk..와 유사해서 표절이라면, 위의 곡들은 제목이 전부 같으니, 표절 논란 따위는 필요도 없이 완벽한 표절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누구 것을 표절했을까요? 물어볼 필요나 있나요? 발표년도만 보면 누가 누구것을 표절했는지 금방 알 수 있잖아요. 그러나 발표년도가 표기되지 않은 앨범의 곡은 누구의 노래제목을 표절한 것인지 해깔리시죠?  당연하시겠죠. 제목만 비슷해도 표절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제목이 동일하면 무조건 표절이라 확신할테고, 표절은 확실한데 발표년도를 모르니 누가 누구것을 표절했는지 막 해깔릴 것입니다. 이런 상황 구석에서 스스로 생각해도 유치하시죠? 단지 그것을 서로 감추기만 급급할테구요. 세상에는 제목이 동일한 곡이나 문화물들은 셀수 없이 많은데 철자 몇개 비슷하다는 이유로 표절이라니 유치한 수준을 넘어서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세계 굴지의 기업 이미지 마크를 만든
http://www.tictoc.com/라는 회사가 언제 설립되었는지 필자는 모르겠지만, 이 회사는 그럼 어떤 틱톡을 표절해서 틱톡이라는 회사명을 지었을까요? 무척 궁금해집니다. 이 회사 CEO에게 문의라도 해볼까요? 누구의 틱톡을 표절해서 회사명을 지었느냐구요. 삼성그룹은 삼성동을 표절해서 회사명을 지었을까요? 아니면 Three Star라는 별 3개짜리 영국식 아파트먼트 등급을 표절한 것일까요? 제가 아는 분중에 이맹박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이명박 대통령보다 연세가 적습니다. 그렇다면 이맹박이라는 분의 부친은 현재 대통이신 이명박님의 이름을 본따서 지었다는 말이네요. 마이클잭슨은 비틀즈의 let it be를 표절해서 beat it라고 노래제목을 붙인거겠죠. 왜요? T'ikT'ak과 Takk..는 유사하고 Beat It과 Let It Be는 전혀 다른가요?  마돈나도 Hung Up이라는 노래에서 Tik Tak Tak이라고 흥얼 거리던데, 그럼 마돈나는 누구의 것을 표절했나요? 누가 누구것을 표절했는지 당신들은 다 알 것 아닙니까? 설마 그런 것도 모르면서 서태지가 시규어 로스의 앨범명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겠죠?

1999~2007까지 활동한 Finland의 팝락밴드 "TikTak"이라는 그룹이 있었다는 사실
서태지가 시규어 로스의 앨범명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당신들은 알고나 있나요? 1999년도에 결성된 TikTak이라는 밴드의 밴드명을 2005년도에 시규어스가 표절해서 앨범명을 지었다는 생각은 잘못인가요? 필자가 볼때는 TikTak과 Takkk..이 훨씬 비슷하게 보이는데, 당신들은 전혀 다르게 보이나 봐요? 차라리 서태지가 시규어 로스의 Takk..이 아닌 핀란드의 TikTak밴드의 밴드명을 표절했다고 우겼다면 좀 덜 유치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표절 논란을 일으키더라도 제발이지 말이 좀 되는 소리로 우겨달라는 당부는 당신들에게는 너무 지나친 바램입니까?  http://kr.youtube.com/watch?v=A9vGziTR8Oo 여기 링크타고 한번 가볼래요? 가서 보고 와서 이 노래는 어떤 틱탁을 표절했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kr.youtube.com/watch?v=dGxOEZHDVt0
 여기도 가서 확인해주세요. 틱탁이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구것을 표절했는지 필자는 도저히 알수가 없네요.

 
두번째로 서태지가 시규어 로스의 99년도 앨범 자켓을 표절했다는 주장이 얼마나 근거없는 추측일 뿐이지에 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일단 하단에 첨부된 이미지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인 태아 이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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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용된 태아 이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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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태아 이미지를 보시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태아를 이미지화하는데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일단 그림을 보면 태아를 이미지화 할때는 모두 쪼그린 자세를 취하고 있고, 비균형(머리를 크게 묘사)적 표현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태아 이미지를 표현하는데는 일정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태아를 형상화하는  작업은 누가 하더라도 유사한 형태를 지닐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합니다. 더군다나 태아에 날개다 달린 이미지들조차 그 크기만 다를 뿐 모두 엇비슷하다는 것도 쉽게 눈에 띕니다. 이렇게 비슷한 태아들의 이미지를 단순하게 제작년도만 보고서 표절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서태지는 98년도에 발표한 테이크원/투의 뮤직 비디오에서 이미 날개달린 태아의 이미지를 형상화해서 사용한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태아의 이미지가 비슷하게 형상화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무시한 채, 제작년도를 기준으로 표절을 따진다면 98년도에 이미 날개달린 태아의 이미지를 뮤직 비디오로 활용한 적이 있는 서태지를 시규어 로스가 오히려 99년도 앨범에 표절했다고 봐야 상식적으로 옳을 것입니다. 서태지가 98년도에 시규어 로스보다 먼저 날개달린 태아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시규어로스가 서태지의 뮤비를 표절해서 앨범자켓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유치한 발상인지는 위의 태아 이미지들이 공통적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누구나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독 서태지가 시규어 로스의 앨범자켓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그 저의가 무엇입니까?  필자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나요? 양심과 상식이라는 것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면, 함부로 서태지가 시규어 로스의 앨범자켓을 표절했다고 주장하지는 못할 상황인 듯 합니다.


 <관련 증거영상

1998년 Take1/Take2 MV>

 



장르가 아니라 스타일의 차용

장르는 결과물보다 선행하지 않으며, 사후에 포섭된다. 새 싱글도 마찬가지다. 곳곳에 전자음이 삽입되었지만 수록된 3곡 중에 장르적으로 신스팝이나 일렉트로니카에 속할 정도로 곡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트랙은 없다. 신시사이저가 주로 활용된 ‘모아이’는 서태지의 가벼운 음색에 전기기타와 건반, 현악이 만드는 기본 사운드로 경쾌하게 서태지 스타일을 강조한다. 8비트 게임기의 뿅뿅거리는 효과음으로 시작되는 <휴먼드림>은 신스팝의 스타일을 빌려 익숙하고 안전한 감수성을 재현한다. 포스트 그런지 사운드의 맥락에 있는 <틱택>은 보편적인 구성과 감수성에 머문다. 물론 노련하고 깔끔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 부여는 지나치다. 이스터섬의 고대문명, 인간이 되고 싶은 로봇의 꿈,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권력 등은 흔한 음모론을 답습하고, 주체와 대상이 불분명한 노랫말은 서사보다는 단상으로 떠다닌다. 그걸 받치고 있는 세계관은 모호하고 미숙하다. 무엇보다 서태지의 음악은 장르가 아니라 스타일의 차용으로 해석하는 게 합당하다.

사후적인 평가로 서태지가 혁신적인 문화 생산자의 위치를 차지했던 것은 그가 글로벌한 대중문화의 전파자일 때였다. 한국 사회가 인터넷이라는 개방 공간과 축적된 산업적 인프라를 통해 다양한 대중문화를 전방위적으로 수용하기 전인, 90년대라는 시대적 맥락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문화적 지위는 획득될 수 있었다. 새 싱글의 하이브리드적 실험은 글로벌한 관점에서 보자면 80년대 말부터 90년대를 통틀어 수행된 시도다. 서태지의 음악적 성과가 비판받아야 한다면 ‘혁신적이지 않다’가 아니라 누군가 이미 완성해놓은 장르와 스타일을 ‘성찰 없이 사용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장르적 토양이 부실한 한국 시장에서 서구의 노래·연주 스타일을 맥락 없이 차용하는 것이 서태지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갱스터랩이나 이모코어를 포함해서 일렉트로니카 등의 기존 스타일을 ‘처음 유일하게 시도했다’고 포장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비평9]장르가 아니라 스타일의 차용이라구요?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것이 바로 언어유희(말장난)이죠. 이제 저도 똑같이 말장난 한번 해보렵니다. 서태지는 장르가 아니라 스타일의 차용이라고 차우진님은 주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음악은 음악이라는 단하나의 장르만 존재해야 합니다. 모든 음악장르는 음악이라는 것에서부터 차용된 것들이니까요. 서양뮤지션이 여러 스타일을 차용하면 새로운 장르가되고 서태지가 여러 스타일을 차용하면 단순하게 차용이라는 논리는 너무 사대주의적인 발상 아닙니까? 필자는 장르 구분을 그다지 선호하지도 않고 또 잘 할 자신도 없습니다. 그러나 차우진님의 음악적 장르적 평가를 읽고서 장르에 관해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우진님께선 수많은 일렉트로닉계열의 사운드 중에서 혹시 신스팝밖에 모르고 계신건 아닙니까? 누가 서태지의 이번 음악을 신스팝이라고 평가하나요? 그리고 포스트-그런지라함은 너바나식 사운드에 실증난 서양뮤지션들이 그런지=시애틀=너바나=얼터너티브식 펑크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사운드에 관심을 기울였던 총체적인 흐름을 싸잡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런지 사운드가 시들해질 무렵 그것과 다른 새로운 사운드를 들고 나온 뮤지션들은 모두 포스트-그런지 계열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서태지의 사운드가 너무 어려웠나요? 차우진님이 알고 계시는 장르명으로는 서태지 사운드를 표현할 수 없기에 싸잡아서 그냥 포스트-그런지라고 표현했다는 인상이 상당히 강하게 느껴집니다. 포스트-그런지라는 식상한 탈장르화 현상적 표현대로 따진다면 너바나 이후 등장한 서태지는 아예 데뷔 당시부터 포스트-그런지 장르였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황당하지 않습니까? 도데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시는 필자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차우진님! 필자가 겸손하게 설명 드리는데요, 누군가 이미 완성해 놓은 사운드란 세상에 없습니다. 도데체 어떤 장르의 사운드가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인지 필자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이미 완성된 사운드나 장르가 무엇인지 알기쉽게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는 없나요? 또한 하이브리드현상이 기존에 시도된 바 있었으니 지금의 서태지의 장류융화적 실험은 기존의 그것을 단순한 따라하기일 뿐이라는 논리는 너무나 폭력적입니다. 왜 폭력적이냐구요? 하이브리드고 로우브리드고 따지기전에 말이죠, 구석기인들이 여가를 즐기며 놀이를 할때, 우가우가라는 감탄사를 연신 내뱉으며 일정한 비트로 몸을 흔들며 서로 장난을 쳤습니다. 그럼 이것은 최초의 랩사운드라는 말이되는데, 미슬럼가에서 태생된 랩이라는 장르도 차우진님과 같은 논리대로라면 구석기시대의 우가우가랩을 차용한 것 뿐이라는 결론입니다. 최근 음악판도는 말이죠, 탈장르화 현상이 급격합니다. 어느 누구도 한두가지 장르에 얽매이길 싫어하고 음악생산자인 뮤지션들조차 자신들의 음악을 일정 장르안에 구속시키는 것을 선호하지 않고 있죠. 이런게 진정한 의미의 포스트적인 성향이 아닐까요? 무엇을 극복하느냐라는 극복대상의 문제가 아닌, 무엇인가를 극복하려하는 그 진행 자체의 포스트적 행보야말로 진정한 진화고 새로운 문화적 형태이고 실험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만, 이런 섬세한 부분을 캐취해내지 못한 채, 단순하게 서태지의 행보를 구하이브리드하다는 식으로 가치없이 취급하는 것은, 서태지의 팬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또 그것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길 열망하는,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음악이 삶이 전부인 한 뮤지션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 차원에서라도 자중하셨어야 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인데요, 만약 서태지님이 이번처럼 새로운 장르를 들고 나오지 않고 기존의 장르로 음반을 냈다면, 변화하지 않고 정체하는 사운드는 퇴보를 의미한다며 역시 혹평했을 것 같군요. 요는 이래요. 서태지는 뭘해도 당신같은 분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결론이 왜 참일 수 밖에 없는지 필자가 이제 증명해야 할 차례군요. 그리고 이 증명은 차우진님이 얼마나 음악적으로 시대에 뒤쳐진 평론가인지도 동시에 증명해 줄 것입니다.

차우진님 주변사람들은 서태지의 이번 싱글이 사운드가 세련되고 깔끔하게 들린다는 평가뿐이 못하고 차우진님은 신스팝이다 일렉트로니카다 별다를게 없다라는 단순한 평론 딱 그 수준일지는 모르겠는데요, 필자 주변 사람들은 이번 서태지의 싱글만으로는 아직 서태지의 8집앨범을 평가하기에는 이르다는 성숙한 의견부터 시작하여, 하지만 싱글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최근 급작스럽게 생성되는 포스트-포크(전자음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급진적인 포크락계열)이나 트랜디한 트랜스계열, 혹은 팝멜로디를 강조하는 드럼드릴앤베이스 사운드라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습다. 위 3가지 의견은 겉보기에는 각기 다른 장르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서태지의 이번 사운드가 서태지님이 새롭게 들고나온 신흥장르인 네이쳐 파운드라는 기본 특성을 모두 포함하는 해석들입니다. 일단 필자가 주변의 의견을 정리한 3가지 구분은 모두 넓게는 일렉트로닉계열을 중심으로 한, 극심한 장르파괴적 특성을 보이고 있고, 이는 90년대 후반 뉴메탈이라는 평단의 명명적 말장난의 연장선처럼 특정장르 몇개로는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한 여러가지 장르의 사운드들이 응집했다는 뜻입니다. 일단 트랜스 자체가 드림팝/일렉트로닉을 중심으로 기타 여러 장르들의 특성이 모두 포함하는 장르파괴형태입니다. 이런 복합적인 트랜스를 트랜디(대중친화적)한 사운드로 바꾸려는 시도, 그 자체가 재탕, 삼탕식의 다양한 장르의 융화를 시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견해입니다. 또한 포스트-포크라는 급진적인 사운드는 통기타 하나만 매고 음악을 해오던 포크계열이 최근들어 적극적으로 전자음(일렉트로닉계열의 다양한 사운드)을 도입하면서 사운드가 증폭되고 일렉키델릭(일렉트로와 사이키델릭의 합성어)하면서도 포크비트의 특성(자연적인 음색)를 고스란히 담아가고 있기때문에 종잡을 수 없는, 전자음과 자연음이라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부조화의 조화, 즉 역설적 사운드라는 장르파괴융화형태입니다. 팝멜로딕 드럼드릴앤베이스도 다르지 않습니다. 드럼드릴앤베이스 역시 일렉트로닉계열의 다양한 하위장르들을 믹스시킨 인더스트리얼계열이기때문입니다. 이것을 싸잡아서 그냥 IDM계열이라고 말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IDM이라는 평가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IDM이라는 자체가 종잡을 수 없는 장르로, 텍스트가 정형화 되어 있지 않은 형식파괴가 심한 형태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명확하게도 서태지님이 말하는 새로운 장르, 네이쳐 파운드와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참으로 수학공식처럼 딱 드러맞는 현상입니다. 차우진님께서 일렉트로닉계열의 다양한 사운드는 둘째치고 nature pound라는 뜻이라도 한번 생각해보고 이 비평글을 쓰신 것인지 필자는 묻고 싶습니다. 자연적인 우주적인 근원적인 사운드가 네이쳐라는 말로 압축되고 일정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난타(연주)한다는 형식파괴의 의지가 파운드라는 말속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결국 서태지님이 새롭게 선보인 네이처 파운드란 일정 형식(장르)의 틀에서 벗어나 좀더 근원적인 사운드(자연적인 우주적인 태초의 소리)를 추구한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존재하는 사운드들 혹은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사운드들까지 모두 포함하고 싶다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장르파괴 현상/형식파괴현상이고, 이런 장르파괴라는 말은 역설적이지만 모든 장르를 포용한다는 말과도 같은 뜻이 됩니다. 그리고 서태지의 이번 첫 싱글의 총 4곡들은 이런 장르파괴 혹은 장르응집적 사운드를 현실적으로 증명해 보여주고 있다는 의견이 필자를 비롯한 필자 주변의 아마추어 감상자들의 견해입니다. 여기서 더나아가 서태지는 서태지만의 멜로디를 고스란히 그 복합적인 사운드에 담아내고 있고, 그래서 더욱 네이쳐 파운드가 설득력있는 실험적인 사운드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필자는 위에서 제기된 크게 4가지의 구분중에 서태지의 네이쳐라는 용어를 강조하고 서태지 특유의 팝적멜로디라인과 부합시켜 포스트-포크(전자음과 자연음의 역설적인 조화)계열이라는 소수의 의견과 입장을 함께하고 있습니다만, 처음에 말했다시피, 위 4가지 구분은 결과론적으로 네이쳐 파운드라는 사운드적 형식의 틀안에 모두 포함되고 있기때문에 이번 서태지의 새로운 사운드, 네이쳐 파운드는 상당한 호소력을 지녔고 동시에 실험적인 사운드적 논리가 탁월하다는 평가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논의는 서태지의 정규8집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때문에 이번 싱글 한장만으로 서태지의 사운드를 평가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성숙한 의견이 지배적이라  서태지님의 사운드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추어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가며 신중하고 진지하게 서태지의 새로운 사운드를  읽어 나가려고 노력하면서도 문화생산자인 서태지님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차원에서 싱글 한장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성숙함을 보이고 있는데, 문화평론가라는 분이 서태지의 정규 8집이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또 명확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너무 성급하고 단순하게 서태지는 신스팝이며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일 뿐 특별할게 없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미리 결론을 내리면 되겠습니까? 차우진님의 글을 보면  분명히 글 곳곳에서 음악적 순수함을 상당히 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차우진님이 그토록 강조한 그 순수한 음악적 평가는 참으로 미비했고, 오직 자신의 논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근거가 너무도 빈약한 서태지표절 루머나  아무 거리낌없이 언급한 것은, 설사 그 의도가 순수한 루머의 고지였을 뿐이라 하더라도 문명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차우진님이 평론을 본업으로 하는지, 부업으로 하는지, 취미로 하는지 필자는 모르겠으나, 그에 상관없이 대중음악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서 집필했다면 음악적인 표절 루머정도는 스스로 알아서 그 사실관계를 최선을 다해 조사하고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판단 한 후에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평론가로써의 기초적인 직업윤리와 의무는 자동옵션으로 딸려간다는 사실 정도는 명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태지님은 말이죠, 이번 한장의 앨범을 완성하기위해 몇년 동안 고심하고 연구하고 노력했습니다. 혹시 이것마저 부정하실 생각이라면, 역시 필자도 당신의 평론가적 자질을 부정해 드리겠습니다. 차우진님도 평론을 하실때면 자신의 이름과 평론가라는 타이틀 때문에라도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생각하고 연구해서 집필할 것이라 예상합니다. 당신의 그 인고의 작업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아신다면, 몇년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좋은 음반 한장 내보려고, 또 그래서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하는 뮤지션의 가치를 한순간에 사정없이 물거품으로 취급해버리려는 행위는 말이죠, 사랑의 매도 아니고 애정의 꾸지람도 아닙니다.  필자는 지금 감정 따위에 호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말이죠, 평론가라면 평론 대상에 애정이 없다면, 중립이라도 지켜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오직 단점만 끄집어 내서 어떻게서든 폄하시키려 든다면, 누군들 평론가를 못하겠습니까? 글 어디를 보나 차우진님의 글에는 서태지님의 노력조차 존중해주려는 의사가 없습니다. 오직 거부와 반대만 무성할 뿐이더군요.

그리고 차우진님은 기본적으로 선행된 문화나 문화물을 차용하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는 입장을 기본적으로 고수하고 계시다는 것을 글 곳곳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일단 서태지 표절 논란이 그랬고, 하이브리드식 차용이라는 주장이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필자도 이에 관하여 명확하게 해둘 것이 있습니다. 차우진님께서 말씀하신 대중문화의 주체는 수용자(문화소비자,대중)라는 표현과 서태지님의 싱글 모아이 첫번째 트랙 모아이곡의 시작부분이 8비트 오락실 사운드라는 표현은 차우진님께서 이 평론을 집필하기 전부터 다른 분들에 의해서 이미 표현된 내용들(
관련링크1/관련링크2)입니다. 그렇다면 차우진님이 서태지님을 비판했던 똑같은 그 논리대로, 차우진님도 차우진님의 글보다 앞서 작성된 위 링크의 글들을 표절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필자는 지금 차진우님이 다른 사람의 글을 실제로 표절했다고 함부로 추측하거나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진우님이 서태지님을 비평했던 부당한 방식의 논리 그대로 따져보자면, 결과적으로 차진우님도 위와 같은 논리대로 표절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 뿐입니다.  이런 상황을 진퇴양난, 혹은 제살깍기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여기서 그만 마칠까 합니다. 아래 마지막 글을 읽고서 혹시 필자가 통제불능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면, 그것은 차우진님에게도 필자에게도 이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신화를 관통했다

분명한 사실은 서태지가 이미 어떤 지점을 관통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를 비판하는 것도, 지지하는 것도, 혹은 숭배하는 것도 그의 현재 위치를 바꾸거나 변화시키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확고한 팬덤 위에 형성된 시장은 그를 환영하고 미디어가 그의 지위를 보장한다. 대중문화의 신화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지금 여기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서태지 신화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명백하다. 물론 개인적으로 어떤 신화화에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일련의 작업들이 대중문화의 자장 안에서 예측 불가능한 반응을 야기한다는 가능성 때문에 쓴다. 정확히 말하자면‘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환기다. 서태지의 음악보다 ‘서태지’가 흥미로운 텍스트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