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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녀의 LIfe/싱글녀의 문화생활

서태지 입문 - 서태지, 그의 역사 ( 총정리)

~[출처 : 이 글은 네이버 지식in에서 퍼온글로 neoist.net 블로그 통해서 가져왔습니다. 원작자 표기를 해달라고 하셨는데 표기되어 있지 않아서 출처만 밝힙니다. 지식인입니다^^]

서태지에 대한 사소하면서도 핵심적인 이야기까지 명료하게 설명되어진 글입니다. 언제부터, 어떻게, 도대체 왜 까지 서태지를 시작부터 2004년까지를 사건들을 잘 설명해 주셔서 퍼왔습니다.  왜 서태지인가.. 왜 아직 '그'인가. 하는 이유를 음악과 사연과 추억들 속에서 되짚어 보게 된 글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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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음악과의 만남

서태지... 본명은 정현철.

1972년 2월 21일 서울에서 유복한 가정의 1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나라 나이로 벌써 35살....)

어린시절부터 발명을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는 풍문이 있지만.
사실 난 그의 어린시절이 어땠는지 알 길이 없다.
 
그 당시 난 태어나지도 않았고, 그렇기에 그와 만난적도 없었으니까..

14살,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때인 1986년 친구들과 함께 스쿨밴드인 하늘벽이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을 했지만, 어느순간 부터 점점 진지해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늘어만가는 연주실력과 반비례해서 떨어져만 가는 성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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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공부는 그에게서 완전히 떠나버리고, 중3때는 전교 537명중 537등..
다시말해 꼴찌를 하기도 했다.
 
또한, 음악에 미쳐서 학교 수업시간 조차 아까워진 그는
가출이 잦아지고,
그에 따라 학교는 점점 그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당시의 기억을 서태지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엔 선생님과 부모님 모두 자신의 갈길을 막는 방해자로만 생각되었다"고 말한다.

음악만 하고 싶어하는 그의 바램과는 달리, 부모님의 뜻대로 서울 북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한해한해 음악에 점점 깊이 빠지면서 그에게는 "음악이 내가 가야 할 길"이란 신념이 생기기 시작했고, ’10년 후엔 우리나라 최고의 뮤지션이 되고 세계로 나가겠다’는 구체적인 미래까지 생각을 하게 된다.

신념과 계획이 세워졌으니 이제 실행에 옮기는 일뿐..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고,
그렇게 그는 17살이었던 고등학교 1학년때 자퇴를 했다. 덕분에 그의 학력은 중졸.

자퇴를 하고 그가 제일먼저 한 일은 밴드에 들어가는 일..


대학로를 전전하다가,
우연히 '활화산'이라는 밴드의 맴버구인광고를 보고,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밴드마저도 제대로 활동을 하기전에 해체가 되었고, 이후 서태지는 우연히 들린 우드스탁에서 이중산씨를 만나 그의 밴드에서 베이시스트로 잠시간 활동하게 되었다.


- 여기서 잠깐 이중산씨에 대해 집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생긴다. 이중산이라는 이름은 일반인들에게는 정말 생소한 이름이겠지만, 적어도 Rock을 한다는 이들에게는 전설적으로 전해져오는 기타리스트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신중현씨와 더불어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명성을 날렸으며, 당대 최고의 그룹들(신중현, 들국화)이 너도나도 기타리스트로 영입하고자 원했던 하지만, 무속인이라는 이유로 소수의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말 그대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2년전 쯤 홍대 클럽에서 우연히 만난 이중산 선생님은 평범한 동네 아저씨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공연을 위해 기타를 잡았을 때의 그 카리스마는.......-


그렇게 우드스탁을 기점으로 이중산씨의 밴드맴버로 활동하고 있던 서태지는 어느날,
그의 연주를 유심히 본 당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씨에게 스카웃된다.

뭔가 서태지가 대단한 연주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실력에 반해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와 당대 최고의 그룹사운드의 리더 사이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 같지만,
신대철씨가 이중산씨에게 서태지를 베이시스트로 영입하기 위해 했던 말은 "형 재 나줘"였고, 서태지를 보고 처음 한말은 "야, 너 이리와봐' ‘너 몇살이야? 시나위에서 베이스 쳐볼래?’ 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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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뛰어난 연주실력을 가진것도, 대단한 무언가를 보인것도 아니었지만, 서태지라는 인물에게서 가능성을 본 두 음악인에 의해서 서태지의 음악인생은 시작되었다. 그의 나이 17살 때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 친구인 김종서를 만난다.

밴드를 하던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중 하나였던 그룹 시나위, 그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황동을 했던 서태지... 화려할것만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말이좋아 당대 최고의 밴드였지, 사실 당시의 방송문화에서 시나위같은 헤비메탈밴드는 1년에 한 두번 방송에 출연할 수 있을까 말까한, 말 그대로 허울좋은 당대 최고였을 뿐이었다. 칭송은 하되 불러주지 않는 밴드.....

신대철은 서태지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에 들때까지 끝까지 연습을 시켰으며, 태지의 리듬감은 인정했지만, Feel이 엉망이라며 "칼박똥필"이라는 처참한 평가를 내렸다.

또 한, Rock의 정통성을 중시하며, 서태지에게 그 뿌리를 알려주고자 했던 신대철과는 달리, Beastieboys, Motley Crue, Stryper등 실험적인 Rock을 하는 그룹들을 추종했던 서태지는 서로 음악적 관점에 있어서 많은 충돌이 있었다. 이로인해 신대철은 서태지가 건방지다고, 서태지는 신대철이 너무 권위적이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사이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대철의 담배 심부름을 충실히 이행할 것 같이 나갔던 서태지는, 담배값 1000원을 받아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서태지는 시나위에서 탈퇴를 했고, 시나위 역시 얼마후 해채됐다. (그냥 가지고 튄 담배값 1000원은 갚았나 몰라.... ?)


이 당시의 이야기에 대해서 훗날 이유를 묻는 김종서에게 서태지는 "우리 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심부름 안 시킨다"라며 이야기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심부름을 시켰다거나 하는 단순한 문제로 인한게 아니라, 서로가 추구하는 음악과 가치관에 있어서 정통과 새로움이라는 두 가치관의 대립으로 인한 결과물이라고 보는게 맞을듯 하다.

이 렇게 시나위를 나와 다시 혼자가 된 서태지는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하고 부터, 틈틈히 배워온 미디음악을 이용 "난 알아요", "환상속의 그대"등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1991년 그의 음악인생 중 영광의 순간들을 함께하게 될 최고의 춤꾼 양현석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한다.


이때 서태지의 나이 19살, 양현석 22살, 이주노 23살 이었다.



2.신화의 시작

서태지와 아이들 1집 (Seotaiji & Boys I ) - 1992년   음반판매량 170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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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Yo! Taiji!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2 난 알아요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3 환상속의 그대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4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5 이 밤이 깊어가지만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6 내 모든 것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7 이제는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8 Blind Love (English Version)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9 Rock 'N Roll Dance (작사/서태지,  작곡/Angus Young ,  편곡/서태지)
10 Missing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20 세기 대한민국 가요계의 역사를 정리함에 있어서, 가요계의 흐름이 바뀌었던 분기점이 되는 해를 꼽으라고 한다면, 1992년을 말함에 있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 분기점이 되었던 음반을 꼽으라면, 1992년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 '난 알아요'를 들을것이다.


"한국어로 랩을 할 수 잇다는 걸 보여준 음악"

"대한민국 가요계에 댄스음악의 새로운 길을 보여준 음반"


그렇다면, 당시의 대중음악이 어땠기에 서태지의 이 음악들이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일까?


대한민국 가요계에 댄스음악이라는 장르가 퍼지기 시작한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이다.

6.25전쟁 이후 미국의 영향을 받아 pop송의 번안곡이 한때 가요계에 유행이었으며, 그 후 청바지와 대학생들을 대표했던 이른바 통기타 문화가 70년대를 풍미했다.

이 후 80년대로 들어오면서, 당시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날렸던 마이클잭슨과 마돈나의 영향으로 한국에도 댄스뮤직이라는 문화가 유입되었고, 때마침 88서울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축제를 계기로 그 분위기에 편승해 정적이었던 음악에서 동적인 음악이 대중 문화의 전면으로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80년대 대표적인 뮤지션인 조용필을 아성을 조금씩 잠식해나갔다.

중 후반으로 들어오면서, 신승훈, 변진섭, 이상우 등의 발라드 라인이 정립됐고,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등이 TV에 얼굴을 비치면서 댄스가수라는 이미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이들을 지칭할때, 댄스음악을 하는 가수 라는 말보다 댄스가수 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하는 음악이 진정한 의미의 댄스음악이라기 보다는 '춤을 추기위해 만들어진 빠른 비트의 가요' 라고 지칭하는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타를 치며, 혹은 가만히 서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서 율동을 가미해 노래를 하기 위해 조금 빠른 리듬을 차용한 것이라고 보는게 맞을것이다.


분명, 마이클잭슨과, 마돈나의 영향으로 변화를 꾀했던 가요였지만. 당시까지 흘러내려오던 한국의 가요문화와, 음악적 수준에 있어서 그들의 음악문화에 따라간다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사실 참 좋은 가수들이었고, 좋은 노래들 이었지만, 이들의 노래는 말 그대로 유행가였고, 인기가수 였지 대중들이 직접 참여하고, 열광하게 하는 댄스음악과, 댄스가수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리고.....


시나위를 나와 새로운 음악을 완성했던 서태지는 1992년 4월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 '난 알아요'의 앨범을 발매하고 당시 MBC에서 새롭게 신설된 "특종 TV연예"라는 프로그램에 출연을 하게되었다.


난데없이 소방차를 연상시키듯이 세명의 젊은이가 그동안 대중가요에서 들어볼 수 없었던 생소한 음악과 격렬한 춤을 TV앞에 보여주기 시작했고, 이 모습은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주었다.


-당시 우연치않게 TV앞에 있었던 14살의 나에게 그들의 모습과 음악은 초등학교 시절 조용필이 가요대상을 수상하던 모습을 보며 느꼈던 왠지모를 짜릿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10점 만점 중 7.8점"


" 요새 유행하는 랩 스타일의 댄스뮤직인데요, 일단 리듬이 되게 상당히 좋네요. 그런 반면에 멜로디 라인이 약한것 같네요.아무래도 랩을 하다보니까 멜로디 부분은 많이 다른 곡보다 훨씬 좀 신경 안쓴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작곡가 하광훈-


"새로운 형식에 내용까지 새로움이 깆들여졌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에요"   -작사가 양인자-


" 의욕적으로 보여서 우선 저는 호감있게 봤습니다. 재미있는것은 동작은 대단히 격렬한데 노래는 섬세한 편이고, 동작을 너무 관심을 두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동작속에 노래가 조금 묻힌것 같은 그런 아쉬움이 없지않았습니다.그동안 오디오형의 그런가수들을 많이 만나봤었는데 오늘나온 여러분들을 계기로해서 뉴키즈온더블록이 우리나라에와서 참 좋은것을 보여주려고 하다가 여러가지 아귀가 안맞아서 실패를 했는데, 그런 아쉬움을 풀어줄 수 있는 실마리가 될수있는 기대감에서 저는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예평론가 이상벽-

랩댄스 장르곡인데 거기에 메탈 리듬이 들어가있네요. 새롭고 다 좋은데, 나쁜말은 안하겠어요. 평은 시청자 여러분들이 하는거니까 그 분들께 맡기겠어요."   - 가수 전영록 -



평가의 점수를 떠나, 그 내용을 정확했다.

하 광훈씨가 말한데로, 당시 미국에서 유행했던, 랩 스타일의 댄스뮤직인 난 알아요는, 분명 그동안 한국 가요에서 들어볼 수 없었던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멜로디를 중시하던 당시 음악에서 벗어나 있는 음악이었고, 반면에 양인자씨의 지적대로 가사는 사실 새롭지 않은 진부한 사랑 이야기였으며, 전영록씨가 말한 것 처럼 그 안에는 메탈리듬이 들어가 있었다.

이러한 서태지의 음악은 이상벽씨의 바램처럼, 뉴키즈온더블록이 몰고온 광풍에서 나타난 한국가요문화의 아쉬움을 채워줄 기대감을 갖게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새로움에 대한 대답은 서태지 신드롬이라는 현상으로 돌아왔다....

신세대[新世代]

[명사]

1. 새로운 세대. 흔히 20세 이하의 젊은 세대를 이른다.

2. 기성의 관습에 반발하여 새로운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고 개성이 뚜렷하며 자기 중심적 사고 및 주장이 강한 세대.


70년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그 중심에는 기성세대가 있었고, 80년대를 지나면서 민주화와 개방이라는 물결속 중심에는 20대가 있었다. 바로 그 시대적 상황속에서 문화적 주체는 각 시대의 중심이었던 이들에게 돌아갔으며, 7,80년대를 거치면서 10대란 항상 사회, 경제, 문화의 소외계층 이었다.

조금씩 커져가는 대중문화 속에서 그러한 10대들이 영위할 수 있었던건 없었다. 방송도, 문화도 10대들은 그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90년대의 대중가요계는 현철, 주현미, 태진아를 중심으로한 트로트와, 신승훈, 박정운등을 중심으로 한 발라드가 그 중심에 있었고, 댄스음악은 이미 하락세를 거듭했다. 그리고, 여전히 10대들은 침묵해야만 했다.


그렇다해서 10대들이 욕구와, 열정이 없었다는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계속되어온 소외 속에서 그들은 분출구를 찾길 원했고, 새로운 문화를 원했다. 그리고, 그런 10대들의 욕구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기 한달전인 1992년 2월 일부나마 세상에 알려졌다.


바로 그 유명한 뉴키즈 온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 방한 소동.

뉴키즈 온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은 당시 미국 최고의 아이돌 그룹으로써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의 신화 같은 그룹) 미소년 같은 외모와 춤, 그리고 신나는 노래로 미국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엄청난 인기를 달리고 있던 그룹이었는데, 그런 그들이 1992년 2월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열었었다. 문화 후진국, 변변한 댄스 음악과 대중을 열광시킬 스타가 없었던 한국에 미국 최고의 아이돌 그룹이 온것이다.


당시 이 공연을 보기위해 20,000여명의 여학생들이 공연장을 찾았는데, 열광을 넘어선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초유의 광란'벌어졌다. 이때문에 공연 시작 20여분만에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이 와중에 200여명이 넘어지고 그로인해 100여명이 부상, 그리고 1명의 여고생이 사망하는 사건마저 일어났다.


그동안 풀곳이 없어서 쌓여왔던 사회의 소외계층이었던 10대들의 욕구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단 한번의 공연이라는 너무나 작은 기회속에서 폭발한 결과였다.

연일 각종 뉴스와 신문에는 10대들의 모습에 대한 걱정과 질책에 이어, 외국문화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탄식과 자책이 어어졌고, 고작 외국가수 하나가 와서 일으킨 소동에 대한 어른들의 부끄러움이 깊어질 즈음...


만화속 히어로처럼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게 된것이다.

기성세대들은 이해를 못했고, 전문가들 조차 그 판단을 유보했던 그들의 음악과 모습은 단 한번의 방송을 기점으로 폭풍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퍼져나갔다.


그 동안 한국에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음악, 그리고 처음 접해보는 패션, 자유스러움.. 그 모든것은 10대를 위시한 젊은이들을 열광시키기 충분했고, 그 예상대로 그들은 열광했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유행이 되어버렸다.  거리는 이른바 '서태지 패션'을 한 사람들로 넘쳐났고, 거리 곳곳에서는 '난 알아요'가 흘렀다.


바로 이때부터 10대는 더이상 사회의 소외계층이 아닌, 주역으로 올라왔다.


감 상하던 음악이 아니라 움찔움찔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새로운 음악, 정적인 모습이 아니라 격렬하게 춤을추던 그들의 모습, 점잖은 옷차림이 아니라 화려하고 개성적인 그들의 패션, 그리고 말 그대로 아이돌같은 그들의 모습에서 10대들은 희열을 느꼈고, 더이상 사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과 더불어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던 기성세대들에게 있어서 외국가수로 인해 일어났던 그 부끄러운 기억들을 일거에 날려버린 서태지란 이름은 문화적 창피를 씻을 수 있는 기회였고, 이로인해 서태지란 단어에 관용스러워졌다.    


'서태지'라는 단어는 10대들이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수용'이라는 이유가 되었으며, "튀면 죽는다 중간만 가라"라는 사회의 인식은 "튀어야 산다"로 인식변혁을 가져왔다. 정말 순식간에 문화의 주체는 바뀌었고, 사회는 이들에 대해 신세대라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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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는 방송 3사의 가요 순위프로를 모두 석권했으며, 가요역사상 유일하게 앨범 수록곡 전곡이 가요차트 50위안에 있었다. 그리고, TV저널 올해의스타상 수상 ,서울가요대상 최고인기상 수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디스크상 수상 , MBC 10대가수 가요제 최고인기가요상과 신인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 등 그해 가요계에서 부여하는 모든 상을 휩쓸었다. 이와 더불어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앨범은 한국 가요계 역사상 데뷔앨범으로는 최다 판매량인 17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어 쩌면, 단순한 '아이돌의 등장' 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냥 인기 많았던 '가수'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 하지만, 서태지라는 인물을 그가 처음 데뷔했을때 부터 쭉 보아온 이들에게 인기가수들과 비교되어지고, 인기가수 취급되어지는 일은 분노를 떠나 어이없음을 느끼게 한다.


그건, 데뷔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온 새로움에 대한 도전과, 기존의 불합리한 제도에의 저항 과 새로운 질서와 문화의 도입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의 음악성을 알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의 활성화


80 년대 초반 미국의 MTV가 개국되면서, 음악문화에서 뮤직비디오란 새로운 장르가 한 부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한국에서는 날로 발전하는 미국의 뮤직비디오 문화에 비해 뮤직비디오란 개념조차 확립되지 않은 가라오케에서 사용하는 영상음악만이 존재했다.

방송과 가수들은 음악의 한 문화로써 뮤직비디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개념도 미비했다.

하 지만, 서태지는 이 뮤직비디오를 자신의 음악에 있어서 표현의 한 도구로 삼았다. 방송에서 적극적으로 뮤직비디오를 활용했으며, 비록 당시 한국의 방송 기술상 한계로 촬영기술은 미비했지만, 더이상 영상음악이 아닌 그 구성에 있어서 미국의 그것과 같은 수준의 완성도 높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냈다.

이로인해 팬들은 TAPE 만이 아닌 뮤직비디오를 찾기 시작했고, 이는 '서태지가 했으니까'란 당시 가요계 풍조에 힘입어 이 후 가수나, 가요계에서 영상음악이 아닌 뮤직비디오의 가치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기획사와 가수 관계의 재정립


국내에 연예계 특히 가요계라는 하나의 세력이 생겨나면서, 지금까지 그 수많은 변화를 거쳐오는 동안 변하지 않은 시스템이 있다. 바로 기획사라는 이름의 주인에게 순종을 강요당하는 가수라는 노예라는 악습이다.  


가 수 개인의 의사나, 희망보다는 매니저와 기획사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이 불합리한 제도는 문화예술을 추구하기 보다는 그 문화예술이라는 시장 안에서 이윤을 얻기 위한 기업으로써 존재하는 기획사와, 아무 도움없이 혼자서는 발을 디딜 수 없는 연예계라는 공간에서 인기라는 또다른 이윤을 얻으려는 가수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정해진 일종의 규칙이었다.


서 태지 역시 데뷔당시 이 악습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만든 음악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마스터 테입을 들고 기획사들을 전전했고, 당시 유대영이라는 기획자를 만나 앨범을 만들고, 방송에 데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인듯 서태지는 그 악습의 희생양이 되었다.


기 획사는 당연히 서태지를 재능있는 음악인으로가 아니라 팔릴 것 같은 상품으로 봤고, 이에따라 최 단기간 많은 이윤을 내기위해 하루에도 3-4차례씩 방송무대에 오르길 강요했으며, 이로인해 최소한의 수면과 식사등 기본적인 건강관리 및, 가장 중요한 음악적 연구에 대한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사 실, 어찌보면 가요계의 시스템 안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서태지는 단호하게 이 악습을 끊어냈다. 데뷔 후 3개월이 지난 7월 서태지는 매니저와 결별 선언했다. 이때부터 서태지는 지금까지 본인의 모든 스케쥴 및 관리를 자신이 직접 하기 시작했고, 이 후 요요기획을 설립 기획사와 매니저에 가수가 고용되어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가수가 기획사와 매니저를 고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 도입했다. 데뷔한지 이제 3개월이 조금 넘은 20살의 애송이가 수십년을 이어져온 방송과 기획사간의 제도를 한순간에 무너트린 것이다.  


서 태지가 행했던 이러한 모습은 본인의 성격에도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가수의 권리를 좀 더 보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태지의 등장으로 인한 가요계의 변동으로 인해, 상품성이 보장된 서태지와 같은 그룹들을 만들어 파는 기획사가 난립하게 되었고 덕분에 서태지처럼 뜰 수 있다는 그들의 조건 때문에 오히려, 기획사의 노예같은 그룹들이 지금까지도 생겨나게 된것은 참 아이러니 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가수의 권리찾기 싸움 - 저작권과 초상권의 확립-


2000년대인 지금 우리는 초상권, 저작권 이라는 단어를 익숙하게 접한다. 하지만, 연예계에 그 두단어에 대한 개념을 처음 도입한게 서태지란 사실을 아는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1992 년 9월 국내 비디오 산업의 첫 저작권 분쟁으로 기록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 소송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의 출발은 전 매니저와 결별을 하기 전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을 놓고 매니저가 서태지의 동의 없이 한 비디오 제작자와 판권계약을 했던 일에서 출발한다. 서태지는 서태지대로 자신이 고른 제작회사와 판권계약을 마친상태였다. 이로인해 동시에 두 곳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가 발매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외에도 몇몇 프로덕션에서 불법으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이미 시판을 하고있었다.


이 런 상황에서 서태지는 단호하게 이들을 고소한다. 그리고, 뮤직비디오에 대한 저작권을 들어 서태지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이와 더불어 시중에는 이미 불법 영상집들과, 나이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들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사진이 불법으로 인쇄되어 싸구려 상술의 일환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서태지는 초상권이라는 당시로써는 정말 생소했던 개념을 들어 철저히 대응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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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런 싸구려 상술의 상품들이 홍수를 이뤘다.. <출처 : 어디였더라.....?>
 
 
 

지금의 모든 연예인들이 당연히 누리고 있는 저작권과 초상권이라는 두 권리는 20살의 서태지가 기존의 거대한 세력들과 싸워서 쟁취해냈던 것이다.

서태지를 서태지로 만든 이유


한국 가요계에서 평론가라는 직업을 물위로 끌어내준 음악, 대만민국 가요계 역사상 매번 음악이 발표될때 마다 감상보다는 분석을 하는 음악, 매번 새로움 이라는 모습으로 무장한 음악.  

이러한 음악이 서태지의 음악이며, 그러한 음악들을 만들어내는 서태지의 음악성이야 말로 서태지가 단순한 인기가수를 넘어선 서태지로 있게만든 근본이다.

물론 그의 음악이 최고라는, 그가 천재적인 최고의 뮤지션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속에서 보여지는 음악적 테크닉과 완성도를 볼때 그러한 표현들이 그다지 어색하지만은 않다.


지 금은 대중가요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지만, 서태지는 진정한 싱어송 라이터(Sing-Song Writer)이자 뮤지션(Musician)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직접 자신의 모든 곡을 작곡,작사,편곡 하고, 노래를 부르는 Sing-Song Writer.


광 복 이후 최대의 음악적 사건으로 평가받는 데뷔앨범에서 부터 지금까지 그의 음악속에서 보이는 음악성은 바로 서태지에 대한 평가의 근본이다. 또한, 서태지는 댄스음악을 하지만, 댄스가수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의 음악을 보면 알 수 있다.


음악에 대한 평가를 하기전에 먼저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 기억 하나 -

초 등학교 때였던가? MC Hammer라는 흑인 랩퍼가 상당히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U Can't Touch This는 길거리와 라디오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고 그때 난 처음으로 랩을 알았다. 그리고, 1991년 난 라디오에서 우연히 ice ice baby라는 노래를 듣고는 그 음반을 구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썼다. 하지만, MC해머처럼 정말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한국에서도 그 유명세를 느낄 수 있었던 가수와 음악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13살이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음반가게를 전전하는 일 뿐이었다. 도입부의 리듬과 ice라는 단어만 가지고, "아저씨 둥둥둥둥둥둥 으로 시작하는 미국 노랜데 ice 뭔가하는 노래 있나요?"  라며 음반가게들을 돌아다녔으니...

그러다 우연히 사촌형과 같이간 청계천에서 드디어 둥둥둥둥을 들었고, 검정색 테이프에 vanilla ice 라고 찍혀진 이른바 빽판을 구할 수 있었다. (1500원 이었던걸로 얼핏 기억이 나는데...)

그리고, 조금 지난 후에야 이 가수의 이 노래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는 (6개월전에..) 사실을 알았다...

내 가 기억하기에도 걸러진 극 소수의 미국 문화만 들어왔고 그 이외에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그 시절에 그리고,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일도, 있다면 시나위시절 그토록 연습하길 강요당했던 정통적인 Metal밖에 없었던, 19살짜리가 만들었다는 음악이라는데 가치를 두고싶다.

음악을 시작하고, 정통 Metal을 하면서 Motley Crue, Beastiboys, Stryper, Milli Vanilli등 미국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음악들을 접한 서태지는 아마 적잖이 음악적 충격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왜 우리는 저런 음악을 못만들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치기어린 도전이었다.


난 알아요


80 년대 후반 미국에서 불기시작한 샘플링은 전통적인 창조의 기법에서 현존하는 음악을 누가 어떤 식으로 잘 꼴라쥬 하는 가의 문제로 변했다. 국내에서도 90년대 초 리믹스 DJ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철이와 미애의 신철에 의해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상륙이 시작되었다.

난 알아요는 이 샘플링이 한국에 정착되기도 전에 만든 밀리바닐리(Milli Vanilli)의 'Girl you know it's true'의 리프를 모델로한 단순하지만 미묘한 감각을 요하는 샘플링의 승리였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표절 운운하는 일부 무식한 이들에 의해 시달림 받고있는 곡이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 천천히 하자.)

표면적으로는 댄스음악이지만, 그 안에는 적어도 세가지 이상의 음악적 코드들이 숨어있다.


첫번째는 Metal이다. 곡 중간에 나오는 강렬하고 헤비한 디소토션 기타 라인이 이 곡을 단순한 댄스음악과 차별을 둔다.


두 번째는 Hip-Hop이다. 당시에는 한국어로 랩을 할 수 없다는 편견이 지배적이었는데, 그 이면을 보면, 불가능 하다는게 아니라 한계가 있었고, 어색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서태지 이전에도 홍서범, 신해철 등 몇몇 뮤지션들이 랩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들의 랩은 영어로 했거나 아니면, 라임이 없이 단순한 음의 고저만을 반복한, 일종의 실험이었다.

하지만, 난 알아요의 경우는 한국어가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넘어섰다.

첫 소절 '나~안 알!아요' 에서 난이라는 단어를 나~안으로 나누고 거기에 나를 길게 뽑아 리듬을 살린것이라던지, 알에 악센트를 준것. "누군가가 나를 떠나 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에서 버려야란 단어를 당김처리 했다던지 두사람이 함께 오버더빙을 하는 등 음소의 분절을 통해 리듬적인 음운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국어를 리드미컬하게 랩으로 만들어냈다.


마지막은 Techno적 발상이다.

기타 애드립, “디스코”하는 외치는 코러스와 기계가 우는소리, 샘플링된 노이즈와 나레이션을 루핑시킨다든지 하는 Midi를 사용한 테크노적 요소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있는 수작이다.

환상속의 그대


'난 알아요'가 아니라 이곡을 타이틀곡으로 하려고 했을 정도로 서태지가 가장 강하게 애착을 가지고 있는 곡이다.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그가 이곡을 리믹스 Part IV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랩 이라는 장르가 생소했던 당시, 더구나 제대로 된 24비트 미디댄스곡도 없었던 그때 멜로디 없이 온통 랩으로만 된, 더구나 음악적 장르를 표현하자면, 당시로써는 정말 생소했던 완벽한 미디 테크노라는 점에서 그 애착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이 천재의 앞서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테크노 음악계열이 대중적으로 작곡 발표된건 2000년 이후였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답게 통속적인 멜로디로 구성된 난 알아요보다는 순수 Midi로만 모든 리프 및 음악을 구성한 최초의 시도였던 이곡은 한국어로 랩을 할 수 있다는 걸 진정하게 보여준 음악임에도, 난 알아요의 폭풍에 가려져 제대로 그 가치를 평가 못받은 비운의 음악이었다.

또하나, 서태지의 음악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만의 가사 구성을 최초로 볼 수 있는 음악이다. 이곡에서 부터 '서태지 가사'의 역사는 시작된다.


ps) 만약 난 알아요처럼 좀더 대중적이고 쉬운 노래가 아닌 이 곡을 타이틀로 했다면 아마 당시의 대중은 너무나 앞서간 스타일에 혼란을 갖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이 밤이 깊어가지만’


최근 음악 사조의 최강세를 보면 HIP-HOP과 R&B가 결합된 음악이다. SG워너비, 씨야, 플라이투더 스카이, 나얼 등등등 거의 대부분의 슬로우 발라드 가수들이 이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 

’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이 밤이 깊어가지만’  이 두곡은 놀랍게도 지금에서야 나오고 또 대중화 된 HIP-HOP과 R&B의 전형적인 결합물이다. 지금에 와서야 대중화 될 장르의 음악을 15년전인 19살에 만들고, 불렀다는건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 내 모든 것’ , ‘이제는’


어찌보면 이 앨범중에서 그나마 가장  한국적인 발라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SYNTH POP 적인 느낌의 이 두곡이 일반적인 발라드와 틀린점은 발라드의 기본인 멜로디 라인보다는 클레식에서 중시하는 화성(Harmony)을 곡 전반에서 중점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화성이란 두가지 이상의 음들은 한번에 냄으로써 또다른 음률을 표현하는 음악의 기굔데, 화성=코러스 라는 단순한 공식만으로 화성을 이용했던 당시의 음악계를 보자면, 실험적인 시도였다.

전반적인 연주 및 라인을 보면 묘하게 두,세음이 동시에 하모니를 이루어 노래 전반을 메꾼다는걸 알 수 있는데, 19살의 고교 중퇴자가 화성을 단순히 코러스 수준이 아닌, 음악 전체에 이용해버린 발칙한 음악이다.


Rock 'N Roll Dance


서태지의 편곡 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래 이 곡은 그룹 AC/DC의 'Back in Black'이라는 곡을 서태지가 편곡한 것인데, 흥 미로운건 'Back in Black'이라는 곡을 들어보면 무거운 듯한 기타 리프에 찢어지는 보컬로 Metal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노래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대철의 기타 이외에는 모두 샘플을 이용한 Rock 'N Roll Dance에서의 기타는 원곡처럼 무겁지 않다. 오히려, 가볍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거기에 특유의 Matal적 보컬을 랩으로 바꿔버려, 처음 들어보면 그냥 랩댄스곡으로 들릴 정도로 완벽하게 편곡해낸 것이다.

아마 정통성과 새로움이라는 대결속에서 Metal도 댄스음악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절충을 실험했던 곡이 아니었다 생각한다.

데뷔앨범인 1집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다. 한국어로 랩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를 바꾼 앨범, 한국에 진정한 댄스음악을 등장시킨 앨범 등등등......


고 교 중퇴, Rock그룹 시나위의 베이시스트였던 청년이 19살에 처음으로 습작처럼 발매한  이 앨범속에는 그 음악적 기반도 없었던 한국에서 Midi를 이용해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던 젊은이의 실험정신이 들어있다.  Metal, Techno, Dance, Synth-Pop, Hip-Hop, R&B 등 한 가수가 하나도 제대로 소화하기 힘든 각기 다른 장르가 한사람에게 이해되고 흡수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만큼의 노력이 있어야 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4월 어느날 TV에 출연하고는 "자고나니 스타가 되있었다"라는 말처럼 일순간에 대한민국 전체를 흔들어 버린 감당할 수 없는 관심을 받은 서태지는 활동 6개월 후인 11월 어느날 홀연히 모든 TV와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기억 둘 '현진영' -

1990 년 현진영과 와와로 데뷔해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할 당시 '흐린기억속에 그대'라는 정통 Hip-Hop을 발표한 현진영. 서태지와 아이들보다 정통적인 Hip-Hop에 가까운 음악을 했던, 어찌보면 한국 대중가요계에서 Hip-Hop을 본격적으로 선보였던 가수였고 상당한 인기를 얻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의 신화적 열풍에 가려 진정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후에 여러가지 스캔들로 사라져갔었던 불운(?)의 뮤지션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Hip-Hop적 음악성은 서태지 못지않게 훌륭했다.



3.신화의 재확인

서태지와 아이들 2집 (Seotaiji & Boys II) -1993년 --음반판매량 210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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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Yo! Taiji!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2 하여가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3 우리들만의 추억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4 죽음의 늪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5 너에게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6 수시아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7 마지막 축제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대한민국 가요 역사상 초유의 폭풍을 몰고온 데뷔앨범을 뒤로하고 어느날 돌연히 서태지와 아이들은 모든 방송 및 언론매체에서 철저하게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지금이야 한 앨범의 활동을 끝내고 다음 앨범이 나올때까지 방송을 쉬는게 당연한 패턴이 되었지만, 당시에 가수가 활동을 접는다는건 정말 상상도 할 수없던 일이었다. 10년차가 됐건 5년차가 됐건 아무리 쉬고싶어도, 방송사가 부르면 바로 나가주는게 관례인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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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랬던 방송판에서 이제겨우 데뷔한지 6개월 조금 넘은 애송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어느순간 모든 방송 출연을 거부하고 잠적해버린 것이었다. 원론적으로 보면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해야하는 가수가 한 앨범으로 보여줄 것을 다 보여준 상태라면 다음 앨범을 위해 과감히 활동을 접고  새 앨범 제작에만 몰두해서 완성도 높은 음악을 팬들에게 들려주는게 옳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일이 '찍히면 매장당한다.'라는 방송계 악습때문에 시도되지 않았었고, 이 당돌한 아이들은 관행을 무시한채 일을 벌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93년 6월 서태지와 아이들은 2집을 발표하고 화려하게 컴백을 했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소식은 이례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화제를 몰고왔다. 각 매체 및 모든 언론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소식을 메인으로 다룰 정도였다. 그리고 이때 그들로 인해 가요계는 바뀌고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랩댄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잠자고 있던 10대들이 가요시장에 전면적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10대들의 등장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그들의 성격을 대변하듯 신승훈, 김건모, 듀스등을 필두로 좋은 가수들이 그들의 능력에 맞게 대중들의 환호를 받게 되었으며, 팬클럽 결성에 이은 보다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팬들의 활동으로 가요시장이 활기를 띄게되었다.


이와 더불어 기획사들은 시장에 나온 10대들을 잡기위해 서태지표 댄스그룹들을 양산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서서히 방송계로 나로기 시작한게 93년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소식이 발표되고, 그들의 새로운 음악과 모습을 기대했던 이들은 1집 때와 같은 랩댄스를 예상했다. 변신이란 단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당시에 그 이상의 무언가를 예상하기에는 무리가 있는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TV에서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가요계와 사회는 다시 뒤집어졌다.


형형색색의 의상과, 상표달린 모자를 상상했던 사람들의 기대를 무참히(?)깨버리고, 헐렁헐렁한 바지와 DARK한 의상, 장신구, 레게파마등 국내 대중문화계에 어쩌면 처음으로 정통적인 HIP-HOP패션을 보여준 그들의 모습은 차라리 반란이었다.

그리고 '난 알아요' 이후 유사 랩댄스가요에 귀가 익숙해진 대중에게 들린 또다른 충격 '하여가'. 랩댄스를 대중에게 알린지 1년만에 다시한번 서태지는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음악을 선사했다

기존의 틀을 다시 파괴하고 Hip-Hop이라는 무기로 무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들의 음악과 메세지를 전하기도 전에 방송사와 언론에 의해 공격당하기 시작했다.

사실 1집때 벌어졌던 저작권과 초상권 관련 다툼에서 이미 방송,언론과의 대립을 야기했지만, 이른바 관례였던 부름을 거부한 서태지에게 방송과 언론은 괘씸죄를 적용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너무나도 당연한 힙합패션과 래게머리가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이유로 KBS에서 출연금지조처를 당했고, 중세마녀사냥을 연상시키는 국민일보 사설 를 비롯하여, 한국일보<서태지 출연제지 잘했다> 조선일보 <연예인불량복장머리'위험수위'>등 거의 모든 언론매체가서태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민일보 사설의 경우 " 어떻게 하면 인간성을 파괴시킬 수 있을까?"  악마는 여러 가지로 궁리를 했다....(중략)...그러나 방법이 문제였다. 악마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인간들이 옷과 유행을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중략)...KBS는 이들의 머리와 옷이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해 이 같은 조처를 취했다고  했는데 많은 시청자들이 KBS방침에 적극 동감을 표시하고 있다"라는 한편의 소설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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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론들의 공격에 대해 무시로 일관한 서태지는 그들의 스타일을 고수해나갔고, 대중의 호응과 열광은 1집때보다 더 그 열을 올렸다.


거리에는 래게파마를 한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힙합패션은 대한민국 유행 트랜드가 됐다.(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전속 의류사는 200%가 넘는 매출성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여가는 거리마다 들리게 됐고, 그들의 앨범은 발매 2주만에 100만장을 넘어서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와 함께 2집 '하여가'에 대한 평론가들 사이에서의 평가가 호평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언론사들은 서서히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KBS에서는 슬그머니 출연정지가 풀렸으며, 각 언론들은 다시 서태지와 그의 음악에 대해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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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덕분에 가수로써 당연한 활동 중단과, 표현의 자유는
서태지가 했으니까 란 명제로 이 후 다른 가수들에게 있어서 면죄부가 되었고, 하나의 트랜드가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2집 앨범은 국내 최초로 더블밀리언셀러(200만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으며, 다시한번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차트 1위를 휩쓸었고, 아시아뮤직패스티발 한국대표 참가, 대한민국 영상음반 대상, SBS 서울가요대상 작곡상 기획상 올해의 가수상, 최고인기가수상 수상,  MBC 10대가수가요제 대상, KBS 가요대상 등 가요 시상식을 다시한번 휩쓸었다.


서태지의 2집은 1집때의 돌풍을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서태지를 다른 가수들과는 다른 '존재'로써 구분짓게 만들었고, 서태지란 이름을 가요계에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93년의 서태지는 그의 활동기간 중 가장 적은 음악 외적 논란이 있었던 때였고, 그로인해 그의 음악에 대한 평가가 주를 이루었던 유일한 시대였다.

하여가


대한민국 대중에게 최초로 Hip-Hop문화를 알리고 대중화시킨 이 곡은 단순한 HIP-HOP을 넘어 지금까지도 음악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음악중 하나라고 손꼽힌다.

일반적으로 3-4분 사이에서 머물렀던 노래들과는 달리 러닝타임 5분12초에 3-4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대부분의 한국 노래들과는 다르게 총 8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사실 이런 말도 안되는 분량과 구성의 곡이 발매되자마자 가요차트 1위를 기록했다는건 대한민국 가요 역사상 전무후무 하리라 생각된다.)

하여가는 댄스음악 이라기보다는 변종된 형식의 Rock 음악이다. 노래를 빼고 반주만 들어본다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Havy Metal 이라고 말할 정도로 베이스가 되는 라인은 Metal이다.

그런 베이스를 기타와 드럼 플레이의 에드립으로 단순한 Metal에서 댄스에 맞는 라인으로 곡을 변화시켜 주었다. 거기에 테크노적인 신디사이저와 프로그래밍, 다이나믹한 랩핑으로 Metal을 아주 완벽하게 Hip-Hop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태평소소리...

흔히들 하여가를 국악과 양악의 접목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정확히 말하면 접목이 아니라 인용이다.. 접목이라함은 국악 및 양악을 서로에 맞게 편곡 재창조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인 반면, 하여가는 완벽히 독립된 서로의 음악들을 하나로 믹싱(Mixing) 시켜버렸다. (하여가속에 들려오는 태평소 소리는 우리나라 전통의 능게 태평소 가락을 연주한 것이다.) 전혀 안어울릴것 같은 Metal, Hip-Hop과 국악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거기에 첨가된 턴테이블러(Turntabler)의 스크레칭(Scratching)...

수시아


2집에서는 1집에서 자주 들었던 Techno 풍의 기계음이 사라졌는데, 이 수시아는 사실 하여가의 카리스마에 가려져 빛을 바래버린 정말 주목했어야 할 곡이다.

2000년 국내와 국외를 막론하고 음악적 흐름은 테크노(Techno)였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한 반복 음에 맞춰 몸을 흔드는....

수시아는 1993년에 만들어진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하게 빠른 158Bit의 Trip-Hop 풍 Techno-Rave다. TRIP- HOP이란 80년대 백인들의 클럽파티에서 유행했던 Techno에 흑인들이 특유의 Hip-Hop리듬을 넣어 만든 트랜드였는데, 주목할만한 건 이 장르의 곡들은 '수시아' 발표후 1년이 지난 94년에야 본토인 미국에서 하나의 트랜드로 정리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2000년에야 전국을 휩쓸었던 반복적인 기계음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던 Techno-Rave를 서태지는 이 곡을 통해 이미 7년 전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죽음의 늪


사실 이곡은 서태지의 개성이 다른곡들에 비해 현저히 적은 이른바 헌정곡 같은 느낌을 줍다. 서태지가 밝혔던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가수중 한명, 1980년대 미국의 POP 중흥을 가져온 주역인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음악을 그대로 답사한 흔적이 보이는 이른바 잭슨팝(Jackson Pop)이다. 탁탁 끊어주는 디스코 리듬에 그루브(Groove)한 느낌은 주는 멜로디 라인.. 마치 마이클잭슨의 댄져러스(Dangerous)를 듣는 듯한 느낌.


'우리들만의 추억', '너에게', '마지막 축제'


이 세곡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팬서비스 곡이다.

무거운 느낌의 Metal Hip-Hop 하여가, 158Bit를 넘나드는 당시로서는 듣기에 부담스러울 수 있었던 수시아, 그루브한 느낌의 죽음의 늪이 전반을 매운 이 앨범에서 밝은 느낌에 팬들과 함께 부를 수 있고 호흡할 수 있는 Jazz풍의 평범한(?) 음악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곡들에서 서태지는 팬들의 의미를 단순히 인기를 쫒아다니는 아이들이 아닌,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는 6집에서 말한 매니아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태지는 자신이 만들었던 랩댄스 음악의 주류를 다시한번 파괴하고 다시 새로운 음악적 트랜드를 유행시켰다. 전혀 다른 음악, 전혀 다른 모습.. 이때부터 서태지=도전과 새로움 이 라는 등식이 성립되었고, 현란한 댄스와 음악으로 무장한 반짝 스타 일것이라 예상했던 사회와 각 매체의 인식을 바꾸게 만들었다. 2집에서 보여준 음악성과 완성도를 통해 서태지는 가수에서 뮤지션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1집 때 부터 조짐을 보이던 제도권과의 마찰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4.서태지 담론

서태지와 아이들 3집 (Seotaiji & Boys III ) -1994년 음반판매량 120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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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Yo! Taiji!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2 발해를 꿈꾸며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3 아이들의 눈으로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4 교실 이데아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5 내 맘이야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6 제킬 박사와 하이드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7 영원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9 널 지우려 해 (작사/양현석,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고 2년...


대중음악계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바뀌었다.


그 동안 수동적인 문화의 수혜자였던 10대와 20대들이 완벽하게 대중문화의 전면으로 나서게되고, 그로 인해 가요시장은 재편되었다. 서태지의 등장 후 그와 같은 형태의 싸구려 댄스그룹들은 서태지의 2집 발표 후, 단순한 음악 형태의 모방이라는 한계를 벗지못하고, 음악성의 문제를 들어내며 사라져갔다. 그리고, 가요계는 그가 도입한 힙합, 댄스를 중심으로, 음악적으로 완성도 높은 발라드와 K-POP 등 각종 다양한 장르에서 신승훈, 김건모, 듀스 같은 진정 실력있는 가수들이 그 능력에 맞게 대중들의 환호속에 최고라는 찬사를 얻었고, 박진영 같은 실력있는 뮤지션도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 실, 3집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 중 가장 음악성이 높았으나 판매량은 가장 적어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이 3집부터 서태지는 더이상 가수, 음악인 서태지가 아닌 대한민국 인물사상 가장 많은 논란과, 언쟁을 야기시키는 사회의 서태지로 바뀌게된다.


이 앨범을 통해 서태지는 그 동안 자신을 가두어 놓고있는 댄스 뮤지션 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본인 음악의 뿌리인 'Rock으로의 회귀' 를 나타냈고, 그것을 통한 실험적인 음악들의 모음이었다. 일례로 3집에는 댄스곡이 단 한곡도 없었다.

덕 분에 열광의 서태지에서 조금씩 안티 서태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의 서태지는 당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음악과 장르를 절묘한 형태로 결합 재 창조 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가는 댄스뮤지션으로써 대중들에게 인식이 되었었다. 하지만 댄스가 아닌 Rock으로의 귀향을 결심한 그의 음악은 더이상 새로운 댄스곡이 아닌 완성도 높고 새로운 Rock음악이었다. 이는 새로운 댄스음악을 바랬던 10대 대중에게 실망을 주기 충분했다.


이 자그마한 빈틈은 그동안 서태지라는 인물에게 불만을 가져왔던 일부 세력에게 공격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로인해 이른바 사탄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누가 처음 퍼트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른체 서태지의 교실이데아를 거꾸로 들어보면 사탄의 메시지가 있다는 괴소문이 전국에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서 태지의 노래테이프를 분해한 후에 롤을 반대로 바꿔 끼운 후 카세트에서 '교실이데아'를 틀어보면 '피가모잘라' 라는 소리가 나온다며 이때문에 '서태지는 사탄이다' 라는 소문이 온라인을 기점으로 퍼졌고, 언론도 처음에는 마치 사실인것 마냥 사탄설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에 편승해 자살설, 게이설, 임신설 등 정말 다양한 루머들이 언론을 통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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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의 부인에도 일부 음악가와 종교에서는 이 노래를 사탄 찬양노래로 지목하기까지 했으며, 서태지는 악마다라는 악마논쟁까지 벌어졌다.


이 는 서태지의 팬들이 노래의 각 음절 한 단위까지 분해한 후 분석을 통해 '피가모잘라'라는 단어와는 전혀 연관이 없음을 밝혀 온라인상에서 대응해나갔고, 소문들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자 결국 MBC 뉴스데스크, KBS 추척 60분, SBS 그것이 알고싶다 등에서 교실이데아를 직접 돌려틀어 사실무근임을 밝혀내면서 잠잠해졌다.

이 사건과 더불어 서태지의 노래는 또다른 측면에서 사회의 관심과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건 바로 그가 노래에 담았던 메세지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대중가요는 사랑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상업가요를 표방하는 대중가요에서 그 이외에 심오한 이야기를 한다는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달콤함을 버려야 한다는. 다시말해 상업성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3집 수록곡의 가사와 내용들을 보면 발해를 꿈꾸며는 통일을, 교실이데아는 우리나라의 획일적인 교육 현실을, 제킬박사와 하이드는 마약남용을 이야기 하는 등 그동안 운동권 가요나, 제야 음악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내용을 담아냈다.


이 후 10대들은 통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특히 강렬한 Hard Core Trash Metal의 교실이데아는 마치 10대들 마음속에 들어가 본것처럼 그들의 불만을 정확히 표현해냈으며, 우회적인 표현이 아니라 어찌보면 교육 현실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꼬집으면서 1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이로인해 사회적으로 교육현실에 대한 집중조명이 다뤄지게 됐다. 반면, 자신들의 아픈곳을 꼬집은 서태지는 교육계를 위시한, 이른바 '위엄한' 어른들에게 찍히는 계기가 됐다.

서태지가 음악에서 이야기한 통일, 교육, 마약등 사회 비판적인 주제와, 그의 가사속에서 보이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또 그로인한 10대들의 반응에 대해 '서태지 담론' 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그의 행동과 음악 하나하나가 사회의 쟁점이 되는 서태지는 정치권에서도 군침을 흘리는 순수한 음악인에서 '논쟁의 꺼리' 로 바뀌었다.

94년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50년 한국을 바꾼 100인'에 가수로써는 최초로 선정되는등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정작 그의 음악 자체는 이미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그 외적인 것들이 이슈가 되었던 어찌보면 최악의 한해였다.


하 지만, 여기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점은 이미 음악적으로 그냥 듣고 즐기는 순수한 평가가 서태지에게서 사라졌다 해도 분명 이 앨범은 동시대의 어떤 가수들의 앨범보다 실험적이었으며, 창작가로써 서태지의 모습과 고뇌를 발견할 수 있었던 음반이었다는 것이다.



발해를 꿈꾸며


3집의 모토는 얼터너티브 락 (Alternative Rock)이었다. Alternative Rock이란 종례 전통적인 Metal Rock에서 좀더 가볍고 듣기 편한 Rock을 모토로 하는 대안적인 장르를 말하는데, 이 앨범이 발표되었던 90년대 초 미국의 주류로 떠오르기 시작했던 장르였다. 당시 미국의 Alternative Rock 밴드였던 R.E.M을 들었던 내게 발해를 꿈꾸며는 완성도 높은 전형적인 Alternative Rock으로 느껴졌었다.

이 곡에서 노래를 빼고 반주에 해당하는 기타,베이스,드럼의 리프구성을 들어보면, 정말 완벽하게 잘 짜여진 Alternative Rock이라는걸 알 수 있다. Alternative 자체로는 정말 완성도 높은 음악이었으며, 그런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서태지가 아닌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던 그당시 발해를 꿈꾸며 이외에 댄스곡이 없었던 3집에서 유일하게 아이들과 함께 부를 수 있는 이 곡을 댄스곡으로 변형 시켜버렸고, 덕분에 그 완성도를 방해해 버리는 결과가 되버린 불운의 곡이다.

교실 이데아


Hard Core Trash Metal의 곡 이다. 서태지는 그의 전작들을 통해 Metal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는데, 이 노래는 서태지가 처음으로 선보인 Hard Core였다.

이 곡 통해 서태지는 그의 Rock적인 능력을 여과없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대중이 듣기에 거북하고 거슬리는 '강하게 내지르기만 하는' Trash Metal을 너무나도 편안하게(?) 갈무리 한 했기 때문일까?  기타 리프부터, 중간에 강하게 쏱아지는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라는 안흥찬의 Teash Vocal은 Trash Metal 답지않은 멜로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나도 Teash 답게 울려퍼진다. 거기에 안흥찬 같은 보이스가 곡 전반을 이루던 기존의 Trash Metal과는 달리 서태지의 약점(?)인 미성의 랩이 곡을 채워 이른바 듣기 거북하지 않은 편안한 Trash Metal을 느낄 수 있다.

또 한, 일반적으로 Hard Core Trash Metal은 어떠한 대상에 대한 불만등을 강도 높게 욕을 하는 가사로 채우는게 통설이었다. 하지만 이 곡에는 욕대신 교육의 현실에 대한 불만을 10대들을 대변한 마음의 가사로 바꾸어 입혔다. 답답한 10대들의 교육 현실을 그 당사자들로 하여금 시원하게 내지르는 Trash Metal 을 통해  내 지를 수 있도록 만든, 정말 가사와, 그걸 부를 대상과, 장르와 딱 맞아 떨어지는 찰떡 궁합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아마  Hard Core Trash Metal 이 대중에게 사랑 받고 또 노래방에서 불리워지게 된건 대한민국 가요계 사상 교실이데아가 최초이자 최후일 것이다.


내 맘이야 , 제킬 박사와 하이드


발해를 꿈꾸며 처럼 전형적인 Alternative Rock을 표방하고 있는 곡들이다. 물론 발해를 꿈꾸며 처럼 댄스곡으로 위장하지 않은... 사실 사운드 자체는 Alternative Rock으로써 정말 흠잡을 수 없다고 느낀다. 놀라운건 정말 훌륭하고 기본에 충실한 Alternative에 담겨져 있는 정말 파격적이고, 초현실주의적(Surrealism)인 가사다. 서태지의 또다른 음악가적 기질인 시적인 감각 ......

영원, 아이들의 눈으로


전 반적으로 강력한 Hard Core적인 음악들로 채워진 앨범에서 어울리지 않는 음악들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이 두 종류의 음악들을 같은 준비 기간에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점이 들정도로 다른 곡들과 극과극을 달린다. 교실이데아나 같은 Hard Core적인 곡과, Alternative 의 곡들을 쓰면서 완전히 반대 성향인 이런 동화같은 곡들을 동시에 쓸 수 있었던 서태지의 감성이 의문스러울 정도다.


일반적으로 발라드로 분류되기에는 좀 어색한 점이 보이는건 이 곡들이 단순한 발라드가 아닌 뮤지컬 음악 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어울릴 음악들의 느낌과 닮았다는 것 때문이다.

특히 영원같은 경우는 당시로서는 정말 획기적으로 관현악 연주가 들어가 있다. 거기에 들려오는 하프의 선율... 그리고 중간 중간 들려오는 왈츠풍의 반주는 음악을 듣다보면 마치 뮤지컬 동영상을 화면은 꺼버린채 듣기만 하는 느낌을 받게된다. 당시에는 이 곡들의 가치에 대해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후일 김동률등 비슷한 음악을 추구하는 후배 가수들에게 곡들의 진가를 평가받게된 음악이다.


널 지우려 해


평범한 Rock Ballad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어색한....



3집은 전작들에 비해 큰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그건 댄스가수에서 Rock 뮤지션으로의 전향을 꿈꾸는 서태지의 음악에서 익숙치 않음을 느낀 대중의 거부감과, 대중성을 버린 실험적인 음악들이라는 이유때문이다.

하 지만, 사실 이전 앨범이나 그 시대의 다른 국내뮤지션의 음반과 비교해 본다면, 가히 걸작이라 불릴 수 있다. Alternative Rock을 기본으로 Hard Core Trash Metal 그리고 뮤지컬 풍의 발라드(?)까지.. 서 태지 개인적으로는 분명 이전 앨범에 비해 가사가 담고 있는 메시지나 음악을 표현하는 틀에 있어서 좀 더 발전된 음악성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그걸 표현하는 사운드 역시 최고를 위해, 국내에서는 거의 최초로 미국 및 캐나다, 일본에서의 앨범작업을 통해 동시대 최고의 사운드를 구현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역으로는 사람들로부터 그의 음악성에 조금씩 딴지를 받기 시작한 기점이 된 음반이라는게 참 아이러니하다..

정 말 많은 이야기속에 3집활동을 마친 서태지는 더이상 순수한 음악가가 아닌 나올때마다 사회적인 이슈를 몰고다녔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문화 전반에 걸쳐 논란이 되고, 그 영향력을 끼치는 본인이 원하지 않은 '문화 대통령'이 되어가고 있었다. 


참 아이러니한 사실 하나는 당시 한국의 언론들이 사탄설을 일제히 보도하며 그를 공격할때 미국의 저 유명한 Time지에 한국인 가수 최초로 '남한음악의 비트를 바꿔' 라는 제목으로 '정치,사회문제를 다룬 노래는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없다는 통념을 깨고 무거운 주제의 노래를 히트시키는데 성공했고, 작은 나라에서 총 5백만장 이상의 음반판매고를 올린 톱스타'라며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다는 것이랄까?



5.bye 문화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 4집 (Seotaiji & Boys IV) -1995년 음반판매량 200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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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Yo! Taiji!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2 슬픈 아픔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3 필승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4 Come Back Home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5 시대유감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6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7 Taiji Boys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08 Good Bye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1995년 10월 서태지와 아이들은 다시 돌아왔다.


컴 백 이전 팽배했던 서태지에 대한 여론은 3집에 대한 실망감(?)과 그당시의 여러 사건들로 인해 '서태지는 이제 한물 갔다' 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이미 3집의 실패(?)와 수많은 오해와 편견등으로 몸살을 앓던 그때의 컴백은 그동안의 등장과는 다른 사뭇 조용했다면 조용한 것이었다.


당시 가요계는 이미 댄스음악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개중에는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실력있는 그룹들도 있었지만, 비슷비슷한 노래들을 불러대는 비슷비슷한 컨셉의 그룹들이 너도나도 댄스음악을 하던 때였다.

그리고 서태지의 컴백쇼가 있던날, 다시한번 사람들은 역시 서태지라는 말을 했다.

남 들이 정장과 반짝이 의상을 입고 춤추며 노래했을 때, 서태지는 형형색색의 개성있는 옷을 입고 랩댄스를 했으며, 남들이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랩댄스를 할 때, 서태지는 힙합룩을 입고 힙합을 했으며, 남들이 힙합을 할때, 서태지는 펑키 스타일의 옷을 입고, 얼터너티브를 했다.


그 리고 95년.. 더 빠른 댄스음악, 빠른 랩, 더 화려한 의상, 더 신나는 리듬을 추구할 때, 서태지는 스노우보드룩을 입고 오히려 느린고 무거운 갱스터랩이라는 Hip-Hop을 들고 나타났다. 다시 한번 현재의 유행과는 전혀 다른 비주류성 음악으로 가요계에 등장한 것이다.

이들의 앨범은 발매 첫날 30만장이 팔리는 등 총 200만장 이상이 팔려 당시까지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3번째 더블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첫번째, 서태지 하여가 두번째 김건모 잘못된 만남, 세번째 서태지 컴백홈)

전과 같은 빛을 보지 못할꺼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서태지의 컴백홈은 각 방송사 가요순위 1위를 독차지했으며,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의상 협찬사인 STOM은 덕분에 매출이 200% 넘게 상승했을 정도로 거리는 다시 스노우보드룩 이른바 서태지 패션으로 점령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 안무는 중, 고등학교 축제때 빼놓을 수 없는 메뉴였고, 춤 좀 춘다는 이들 사이에서 그들의 안무는 필수가 되었다.

거 기에 더불어 가출한 청소년 이야기를 다룬 컴백홈을 듣고 실제로 가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온 학생의 이야기가 각 방송사 뉴스를 통해 전파를 타면서, 그야말로 '서태지가 하면 된다.' 라는 인식과 함께 3집에 이어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서태지에게 '문화대통령'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게 되었다.



이당시 활동중이던 서태지에게 가장 큰 두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대표곡인 컴백홈의 표절논란과, 공연윤리 위원회와의 싸움이었다.


대 표곡이었던 컴백홈에 경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미국 정통 힙합 장르중 하나인 Gangsta Rap(갱스터랩)이었데, 랩을 씹는듯이 딱딱 끊어서 하는게 특징인 장르였다. 미국의 Cypress Hill(싸이프레스 힐) 이라는 그룹이 이 장르의 대표주자 였는데, 누군가 이 그룹의 음악과 컴백홈이 유사하다며 표절의혹을 제기하고, 그게 또 사회 전반으로 퍼져 언론에서 화제가 됐다.

그 리곤, 표절이라는 문제가 사회의 전반으로 부각되는 계기가됐다. 연일 언론과 사회에서는 표절이네 서태지측과 팬들은 장르의 스타일일뿐 표절이 아니다의 논쟁이 계속됐고, 여기에 서태지는, 결국 자신의 앨범을 직접 미국의 Cypress Hill(싸이프레스 힐)에게 보내 표절이 아님을 재 확인 받고서야 이 논란은 종식됐다.

두번째 사건은 공연윤리위원회와의 싸움이었다.


사실 공연윤리 위원회와의 싸움은 이전에도 정태춘씨와, 강산애씨를 비롯 많은 가수들이 음지에서 싸워왔는데, 그 결정적인 카운터 펀치가 바로 서태지였다.


지금이야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발표되는 모든 음반은 번저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이하 '공윤')에서 부적절한 가사가 있는지 먼저 심사를 한 후, 통과해야만 발표를 할 수 있었다.

이 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었던 어이없는 사전심의제도라는 법이었는데, 사실 이 법은 비 도덕적인 내용을 막는다는데 그 의의가 있었지만, 정작 심의를 하는 이들의 구 시대적 사고로 인해 오히려 창작자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문제가 있었다.


서 태지와 아이들의 4집 역시 이 공윤에서 사전 심의중 시대유감, 컴백홈, 필승의 가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시대유감의 경우 '가사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며, 대중들의 심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공륜은 서태지에게 가사를 부드럽게 순화시켜 고칠것을 명했고, 서태지의 대답은 아주 간단 명료했다. 가사를 완전히 드러내고 연주곡만 발표한 것이다.

이일은 곧 세상에 알려졌고, 온라인과 언론들로부터 공륜의 처사를 비난하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사실 이 속내를 보면, 온라인 상에서의 비난여론은 서태지의 팬들이 순수하게 일으킨 여론인것에 비해, 언론매체는 그동안 공륜이 무서워 제대로 말하지 못한 비난을 서태지라는 방패를 이용해 부채질을 한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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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륜의 심의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공륜은 "서태지의 4집앨범에 사전 심의시 없었던 가사가 무단으로 삽입되고 가사를 바꾸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며 검찰에 고발을 했다.


이러자 불길은 더 거새졌다. 서태지의 팬들과 서태지는 이를 공륜의 보복조치로 받아들이고, 분노했다. 이 분노는 당시 문화체육부와, 국회등에 수천통의 항의편지로 표현되었으며, 공륜 철폐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결국, 당시 야당이었던 국민회의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진상 조사단" 이 구성되었고, 진상규명위원회까지 열리게 되었다. 이에 공륜은 서태지에 대한 고소를 급하게 취하했고, 11월 국회에서는 사전심의제도의 완전 철폐를 골자로 한 법률이 통과됐다.

그리고 서태지가 은퇴한 후인 1996년 6월 7일, 그 팬들의 끈질긴 싸움끝에 드디어 공륜의 사전심의제도는 없어졌다.


가수가 절대 건드려서는 안될 세력 중 두곳이었던 방송과 공륜... 이 두 거대 공룡과의 싸움에서 서태지와 그의 팬들은 승리를 한것이다.



Hybrid(혼합) .....


단순한 댄스와,발라드,트로트 일색이던 대한민국 가요계에 20여가지가 넘는 각 장르들을 대중에게 좀더 가깝게 소개했으며, 늘 우리나라에 대중음악계에 정착되지 않았던 외국의 선진 음악들을 가장먼저 듣고, 가장 먼저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고, 가장 먼저 대중에게 알렸던 서태지...

그의 장르는 한마디로 규정되지 않은 Hybrid다.

Come Back Home


Gangsta Rap이란 말 그대로 범죄자들이 하는 랩이라는 의미다. 힙합이라는 장르가 미국의 빈민가 흑인들이 클럽에서 Bit에 맞춰 욕지거리나, 또는 비난등을 하기 시작하고, 이것이 좀 더 발전해서 하나의 형식을 갖춘 것이라고 한다면, 이 갱스터랩은 힙합의 원조이자, 어찌보면 한국과 가장 동떨어진 문화다.  서태지의 난 알아요, 하여가등 이후 사랑타령의 랩과, 댄스곡에는 랩을 넣어야 한다는 공식만을 차용한 댄스그룹이 누가더 빠른 랩, 누가더 빠르고 신나느 음악을 하느냐로 대중에게 어필하던 때에 느릿느릿한 원조 Gangsta Rap 을 만들어 발표했다는 사실은 자신감을 뛰어넘은 오만함 아니면, 미친짓이었다. 하지만, 이 곡은 그 오만함조차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하다.

Hip-Hop에서 쓰이는 랩의 경우 한국어로 랩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사실 본토의 그 Hip-Hip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게 사실이다. 더구나 Gangsta Rap이야 오죽하겠는가... 음률과 음절에 따른 리듬의 진행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Come Back Home은 완벽하리만치 미국의 그것과 닮았으며, 그 분위기를 자아낸다. 완벽하게..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시대유감


Gangsta Rap에 이어 이제는 Modern Alternative Rock이다. 도대체 이인간의 다양성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거기에  Modern Alternative Rock을 표현한 것을 넘어서 연주속에 들려야할 노래를 Rock이 아닌 씹어 뱉는듯한 Gangsta Rap 스타일로 버무렸다. 

Modern Alternative Rock과 Gangsta Rap의 만남이라고 할까...

그러면서 서태지는 이 두곡을 통해 이 사회를 정말 실랄하게 비판했다. 정말 듣는이로 하여금 뜨끔하게..


슬픈 아픔 , 필승


3집 교실이데아에서 보여주었던 Hard Core Trash Metal 에 Hip-Hop적인 요소를 가미한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무거운 느낌의 기타와 베이스, 드럼리프속에서 늘어지는듯한 하드코아적 랩이 깔리고, 그 중간중간 찢어지는듯히 강렬 서태지의 Trash Vocal......

Free Style


이 노래를 들어보면, 가장 신경을 안쓴(?) 정말 가벼운 마음과 자유로운 느낌으로 쓴 곡같다.

가장 무거운.. 그리고 힘들었을 Good Bye 뒤에 나오는 이 노래는 자유를 찾은 자신을 대변한다.. 말 그대로 Free Style.

KNOCK THE WORLD,BREAK THE WALL,ROCK & ROLL
세계의 문을 두드려라...... 벽을 부숴라... 그것은 나의 ROCK & ROLL이다.



- 서태지는 영원한 대한민국의 비주류이다... 늘 주류의 선두에 있었지만, 그는 철저한 비주류였다. 그가, 4집에서 보여주었던 스노우보드룩 그리고, 이 음악의 배경인 스노우보딩..

1995 년 겨울의 대한민국 스키장에서 스노우보드는 이방인이었다. 무주를 제외한 거의 모든 스키장에서는 스노우보드를 착용한 이들의 리프트 탑승을 금지시켰고,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보드를 매고 슬로프를 걸어 올라가야 했다..... 스노우보드는 스키라는 기득권층에게 있어서 하나의 도전자들 이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도전자들에겐 자신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더 넓은 Free Style이 있다는 것을........... 서태지는 그 도전자들 중 하나였다. 서태지의 4집 활동과 더불어, 국내에 스노우보드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이는 각 스키장들의 스노우보드 규제를 풀게하는 이유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1세대 보더들에게 서태지는 소외받던 그들을 당당하게 끌어내준 은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태지의 스승이었다. 그들은 모두 도전자였다.

서태지=새로움 이라는 공식을 세워버린 후 매 앨범마다 당시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장르들을 도입하고, 또 재 창조하면서,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서태지는 새로워야 한다는 이상한 등식을 대중과 사회는 요구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더이상 음악인이 아닌 음악인이 되어버린....


그리고........


1996년 1월 31일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무런 예고없이 은퇴 기자회견을 열었다....새 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른 창작의 고통 그리고, 화려할때 미련없이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서태지와 아이들은 각자의 길로 갔다... 이날 서태지의 갑작스러운 은퇴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각 방송사의 9시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다.. 어쩌면 가수로써 가장 화려한 은퇴식이 아니었을까.


20살이었던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댄스 그룹으로 시작해서, 말 그대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스타가 되어버린 서태지.

본인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성원과 기대속에, 단지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이가, 기획사도 없이 홀로 방송국과, 언론과, 사회와 대중과 싸워가며 보냈던 4년... 대한민국 건국이래 그 만큼 사회 전체의 관심과 논란이된 인물은 대통령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14살때부터 음악만을 해온 20대의 젊은이였다. 


같은해 7월 서태지와 그의 팬들이 함께했던 공윤과의 싸움이 끝나고, 가사없이 발표됐던 시대유감은 '희망을 찾아 나섰지만 칼든 사람에게 토막난 채 쓰레기통에 쳐박히는 물고기....그러나 날아오르는 꿈을 잃지 않는다' 메세지를 담은 '토막난 물고기도 하늘 나는 꿈을 꾼다' 라는 주제로 가사를 채운채로 발매되었다.


2004년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KBS홀에서 시대유감이 울려퍼졌다. 그것도 정확한 가사가 자막으로 흐르며... 1995년 공윤에 대항하며 함께 싸워온 그때 그 팬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6.왕의 귀환

서태지 솔로 1집 (Seotaiji Solo I) -1998년 ------음반판매량 130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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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ya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2. Take One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3. Take Two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4. Radio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5. Take Three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6. Take Four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7. Lord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8. Take Five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9. Take Six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2년전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미국으로 가버렸던 서태지가 1998년 아무런 모습도 나타내지 않고 몇줄의 이메일과, 한장의 마스터 시디를 한국으로 보냈다.


서태지의 앨범발매에 부친 팩스 인터뷰 전문중에서 


이번 앨범의 모든 곡들에겐 제목이 없다. Take One, Two...  이라는  것은  연작의 의미는
아 니다. 그저 무의미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그 이유를 약간 설명하면 지금까지 여러 곡들을 만들면서 제목과 작품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끔 제목이라는 것은 작품을 설명하기엔 어렵거나 또는 좀 왜곡 되어  보이는 느낌을 발견했다. 미술작품이나 음악을 최초로 접하게 될 때 그 제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느끼는 느낌이 진짜 느낌같다. 그런 이유에서 이번 앨범에는 좀 색다른 시도를 해본 것이다. 이번 음반은 나에게 중요한 의미의 음반이다. 음반을 내기까지의 많은 고민도 있었고, 음악을 만들면서 나 자신과의 싸움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음반을 내게된 동기나 과정 역시 예전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었다. 여러 면에서 내겐 새로운 도전 같은 것이었다. 거두 절미하고 지금 나는  정성을 다해 하나의 음반을 완성했고, 이제 나의 팬들과 음악을 통해 다시  만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렇게 발매된 서태지의 솔로앨범은 당시 그를 둘러싼 은퇴 번복에 대한 논란과 러닝타임 문제(총 28분)등은 앨범 자체에 대한 이성적인 음악적 평가를  할 기회를 막아버렸다.

온 라인에서는 "미국에서 돈떨어져서 돈벌려고 음반냈다" 는 악질적인 논쟁이 오가고, 은퇴를 선언한 가수가 인터뷰 한번, 얼굴 한번 안 내비치고 음반을 낸 것에 대해 대중매체는 덩달아 그 분위기에 편승해 나갔다. 거기에 더불어 당시 대중 문화의 문제점에 대한 책임을 서태지에게 돌렸다.


98 년의 대중음악계는 서태지 은퇴 이전과 그 판도가 변했다. 사람들은 댄스음악만이 주류를 이루고, 모든 가수들이 10대 위주로 편중 된 지금의 가요계를 서태지의 책임으로 전가를 하는데, 정확하게 보면, 서태지가 은퇴하기 전 주류를 이루었던 댄스가수들을 보면 듀스, DJ D.O.C, 터보, 룰라, cool,박진영 등 각기 개성있는 실력파 댄스그룹들 이었지, 음악성은 이미 처음부터 버리고, 10대들의 구매욕을 높이기 위해 포장을 한 지금의 IDOL들이 아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댄스음악을 했지만, 이런 댄스음악을 한 적이 없고, 춤을 췄지만 이런 장난감 같은 춤을 춘 적이 없으며, 패션의 다양한 변화와 트랜드를 선도했지만, 이런 인형같은 옷을 입은적은 없었다.

그러나, 서태지는 책임을 지도록 강요받았고, 5집의 발표와 함께 음악적 평가를 뒤로 물린채 이 문제에 대해 다시한번 추궁을 받아야 했다.




난 여기서, 서태지의 팬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서태지가 은퇴한지 2년.. 그 2년간 그는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팬들에게 조차..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팬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서 태지는 공식 팬클럽이 없다. XX의 공식 팬클럽 XX 같은게 없다. 기획사에서 만들고 관리하는 여타 가수들의 팬클럽 문화가 아니라, 팬들 스스로 만든 모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서태지는 그러한 모임에 어떠한 혜택을 준다거나, 특권을 준적도 없다.

그럼에도 서태지가 은퇴한 후에도 팬들은 자생적으로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온라인상에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 리고, 서태지가 5집을 발표하고, 사회와 언론이 그의 외적인 부분을 비판하고, 대중문화의 문제를 서태지의 책임인양 떠 넘긴채 그의 음악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자, 그들은 스스로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자, 해외의 웹진에 5집에 대한 평가를 의뢰했다.

사 실 간단한 일 같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걸 안다. 단순히 음악 파일하나 딱 보내놓고 평가해달라고 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평가를 받을 공신력 있는 웹진을 찾아야 하고, 그 곳이 정확하게 어떤 음악을 주로 평가하는지 어떤 시스템인지 알기위해 사이트 전체를 해석해야 하고, MP3파일이 아닌 정확한 사운드의 평가를 위해 CD를 우편으로 발송해야 한다.


또한, 정확하게 수신이 되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며, 수시로 진행사항을 체크해야한다. 리뷰를 해줄때까지.... 한 웹진에 수십번을 보냈을지도 모르고, 그런 곳을 몇십군데나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답변을 받았다. 서태지 관련 각 사이트에는 자랑스럽게 이건 어디어디의 리뷰, 이건 어디어디의 리뷰...라며 친절하게도 해석까지 달고. 그래도 못믿을까봐 아예 주소까지 링크시켰다.

그 리뷰의 내용은 지금의 내가 기억하기에도 상당히 좋은 평가들이었다. 한국에서 습작 수준이라며 비판받는 곡들이 정작 본토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 그 리뷰 하나를 받기위해 노력했던 이들의 기분은 어땠는지 상상이 간다.


차라리 눈물겹다. 누가 시켜서도 아닌, 그냥 분해서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박수를 쳐주고 싶다.  


국내에 없었던 서태지에게 그에 대한 비판자들의 논리에 반박할 기회마저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팬들은 당당하게 자신들의 신념을 지켜나갔다.




그렇게 그들이 지키고 정당한 평가를 받고자 했던 음악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서태지가 2년간 미국에 머물며 본고장의 정통 Alternatice  Rock을 듣고 지내며, 완벽하게 자신만 Alternatice  Rock을 만들어냈다. 또한 이 앨범은 서태지의 "소리의 실험"이었다. Alternatice  Rock을 기본으로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소리를 최상의 사운드로 담아낸 소리의 집합체...


이앨범의 완성도를 볼 수 있는 단면중 하나는 곡의 구성이다. 러닝타임 28분... 기존의 대한민국 가요 앨범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정말 짧다. 그래서 비판도 받았다. 무조껀 많이 넣으면 좋아하는 다다익선의 대한민국 이니까.. 그러나, 이 28분짜리 앨범은 다른 앨범들 처럼 한두곡을 제외하고 그냥 넘겨 듣는 앨범이 아니다. Take One에서 Six까지의 각각 독립되어 있는 6곡은 곡 사이사이 들어있는 연주곡과 만나면서 28분짜리 교향곡을 만든다.

4분짜리 노래 10곡을 만드는 것과 28분짜리 한곡을 만드는 건, 그 규모부터 틀려진다.  마치 하나의 교향곡에 몇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클래식을 듣는 기분이다.


그리고, 각 곡에 들어있는 가사에서 보이는 문학성이다.

화 자의 이동을 통해 대화성을 획득했고,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서태지만의 독특한 상징과 은유... 그 난해한 가사들이 각 곡의 주제를 하나가 아닌 두개 이상으로 분열시키고, 또 각기 다른 그 주제와 가사들을 연결하면, 하나의 음악 영화가 탄생한다. 더욱이 서태지가 스스로 설명한 곡의 주제와 가사를 연관시키다 보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그건 본인이 설명한 주제와는 다른 관점 즉, 서태지 스스로의 자아를 표현한 가사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1. TAKE ONE


내가 말했잖아 너를 데려간다고
너의 아픔들은 이제 없을거라고
나의 마음 깊이 너를 만들었어
너는 알 수 없는 아득한
오랜 세월속에 아픔을 느낄 때
떠올려봐 나의 한 손에 너의 심장이 뛰고 있어
같은 시간 또다른 생명

내가 말했잖아 고통없는 세상이
너의 두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고
네가 갇혀있던 그 벽을 올라설 때
누구도 알지못한 미래가 빛의 진실속의 두려움
날 믿어봐 뛰어날아봐
너의 눈밑엔 큰 바다가 춤출거야
같은 시간 또 다른 세상


이곡은 '진화설'과 '창조설'로 크게 나뉘는 인류탄생에 관한 이야기중에 '외계 유입설'이라는 또다른 가설을 소재로 한 노래이다. 현재 지구상의 많은 인간들은 개인의 이기심에 서로 헐뜯고 싸우고 크게는 국가적 이기심에 많은 사람들이 전쟁속에 죽어가고 있다. 현재 인간들은 이기와 고통속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위의 내용들을, 인간을 낳아준 어머니의 입장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이야기 한 것이다. 어머니란 바로 외계인을 뜻하며 상상 할 수 없이 진보된 문명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2. TAKE TWO


머저리같은 니가 가슴 졸이든 뭐든 해봐 찔러봐 뭔가 힘 좀 써봐
너의 가슴 속을 생각할 수가 있게 그 지옥같은 곳에서 빠져나오게
망쳤어 니가 미쳤어 이제 끝났어 무식~~소리를 내
사실은 고백을 해야할 시간 역시 좀더 나은 화질의 디지탈 티비 티비 티비
사과에 꽂혀버린 색연필에겐 단지~저고리에 숨어버렸어
아마 결국 씨앗을 관통했을껄 아마 오래가지않아 넌 죽어버렸을껄
잊어버려 사실을 다시 소리지를 일이 있길 바라게
이건 정말 내 생각이랑은 반대야 역시 좀더 후진 화질의
오래된 티비 티비 티비 못찾겠어 티비티비 티비

깡통같은 자식들 내가 아무래도 그렇게 멍청할 것 같냐
내 마이크에 누가 껌을 붙여놨어 진짜 좀 더럽게 좀 굴지마
너의 맘대로 살아가도 돼 상관없어 그대로 썩어가도 널 누가
왜 너는 그냥 맞기만해 다들 왜 그냥 멋대로돼 티비 티비 티비
못찾겠어 티비 티비 티비 티비 티비 티비 못찾겠어 티비 티비 티비


이 곡의 메세지는 일부 권력층 혹은 힘있는 자들의 비인간적인 심리를 꼬집은 내용이다. 낙태문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들의 갈등, 등 여러 가지의 내용들이 어지럽게 혼돈하고 있고 결국 그 안에서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나타냈다.

3. TAKE THREE


이제까지 내가 안간힘을 써야했던건 많은 나날속을 방황했던 건
어둠속에 내가 묻혀 결국 후회속에 죽기 위함이었나
난 세상의 무게를 주장했다. 나의 어깨를 짓누르는불행
나약했던 나의 마음속에는 악마의 생각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에겐 흥분만이 가득했다. 생각없는 아이의 무일푼의 도박,
영원히 잠드는게 아니다. 영원히 어둠속에 깨어있다.
난 어둠속에 깨어있어,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너를 일으켜,
이제 검은 흙이 나를 뒤덮고 그것은 고통의 무게로 날 짓누른다.
예전에 결코 알 수 없었던 전혀 다른 두려움과 함께 난 갇혀버렸다.
도피의 끝은 진정 죽음은 아니었다. 난 죽었지만 고통은 살아있다.
죽음뒤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나는 괴로움에 몸부림도 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난.. 굳어 버렸다.네가 계속 나약해질수록...
기억해라 불행은 너를 사랑한다.


이 곡은 나약한 현대인들이 자칫 쉽게  생각 할 수 있는 '자살'에 관한  나의  생각들이다.
현실에 대한 도피의 끝은  결코 죽음이 아니며 자의적인 죽음 속에서 누구도 구제 받을수 없다는 메세지를 담은 곡이다.

4. TAKE FOUR


내가 말했었던건 천국은 아니었지
내가 말했었던건 천국은 아니었지
네가 떠밀려왔던 거기서 사기당한거야
마음속에도 없던 말들을 항상 너는 반복했어
결코 너의 발언에 숨막혀 질식당하기 전에
착하면 좋겠어 타버리는 종이처럼
상대를 깨뜨리려 나보고는 꺼지라니

사람을 캐는 세상 머린 가난했지
네가 겁에 질려 있는 것처럼 끝이 나기전에
결국 아무리 소릴쳐봐도 시원하게 되진 않았어
뭘까 생각해보는 사이에 쫓겨나면 안돼
착하면 좋겠어 타버리는 종이처럼
상대를 깨뜨리려 나보고는 꺼지라니
맑으면 좋겠어 부서지는 가루처럼
넌 조금만 멈춰서봐 진정으로 남기위해


이 곡은 '불행한 너'라는 가제목이 있었고 바로 그것을 주제로 한 곡이다. 많은 청소년들이 부족함 없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불행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어느 리서치 결과를 본적이 있다.어떤 일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단지 거품속에서 살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진정한 '행복'의 힌트를 제시하는 곡이다.

5. TAKE FIVE


내겐 좋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해. 쉽지 않은건 같은 자리에 있었어
맘속 가득한 진실을 느끼고 더욱 강하게 네안에서 난 믿음을 찾았어
난 꿈의 소중함을 알았어 할 수 있는 마음 변치않은 모습
그렇게도 난 큰 빛을 얻었어
절망할순 없는 구속받지 않을 삶이라는 것 행복한 너의 모습
빛이라는 건 일어서는 것 가까이 있게

내가 너를 만난건 행운이었어. 이젠 너를 통해서 내가 살아가고 있어.
맘속 가득한 행복을 느끼고 항상 새롭게
내가 못다한 꿈을 이룬다면 그건 또 다른 나란걸
할 수 있는 마음 변치않는 모습 그렇게도 난 큰 빛을 얻었어
절망할순 없는 구속받지 않을 삶이라는 것 행복한 너의 모습
이 넓은 세상을 느끼는 강한 네 모습
빛이라는 건 일어서는 것 가까이있게픈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우정과 믿음에 관한 노래이며, 나의 진정한 친구들에게 보내는 메세지이기도 하다.

6. TAKE SIX


이제 난 또 다시 일어서는 거야 날 힘있게 다시 만들거야
머나먼 길을 떠나 내가 찾은 곳은 낯설은 세상이었지
거리를 하루종일 걸어다녀봐도 내겐 아무 관심도 없어
굉장한 일이었어 모든건 달라지고 예전에 내 모습이 돌아오는 것 같았어
이제 난 또 다시 일어서는 거야 날 힘있게 다시 만들거야
먼 훗날 누군가 나를 찾고 있어 난 대답하지 않겠어
새들의 노래속에 깨어날 수 있어 새로움의 느낌속에서
허전한 마음들도 함께 살고 싶어 그리움을 가득안고서
밤마다 하늘을 봐 네 소식을 전해 들어
아쉬운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사랑해왔던

이제 난 또다시 너를 보고 있어 널 하루도 잊진 않았다고
먼 훗날 우리가 서로 힘들때면 난 너를 만나고 있어
파란 하늘속에는 네가 살아 숨쉬고 있어 날 보는 것 같아
정말 그런 것 같아
밤마다 반짝이는 저 별들을 보고 있으면
너의 눈이 생각나 반짝이던 네 눈빛이~


FAN들과 헤어져서 지난 2년반이라는 시간속에서 내게 일어났던 일들과 내가 느껴온 감정들을 솔직하게 담은 노래이다.

많은 논란속에 은퇴이후 2년만에 발표한 이 앨범은 은 Musician에서 Artist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이제 대중의 눈만을 위해 만드는 음악이 아니라 진정 자신이 하고싶은 음악을 하겠다는 서태지의 의중이 담겨있다....


7.mania

서태지 솔로 2집 (Seotaiji Solo II) -2000년 --------음반판매량 130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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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템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2. 탱크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3. 오렌지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4. 인터넷전쟁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5. 표절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6. 대경성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7. 레고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8. 울트라맨이야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9. ㄱ나니?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Hidden Track. 너에게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21세기의 시작인 2000년 8월 은퇴 후 4년 7개월 만에 서태지가 솔로 2집을 들고 대중앞에 모습을 들어냈다. 서태지의 입국일을 기점으로 매스컴에서는 연일 그에 대해 집중조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태지가 한국에 오던날, 김포공항은 수천여명의 팬들과 수백명의 기자들로 마비상태가 됐다. 은퇴를 선언한지 4년 하고도 7개월.. 그동안 단 한장의 앨범만을 발매하고 얼굴도, 소식도 없던 한 가수에 대한 팬들의 열광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한민국은 다시 한 가수의 컴백에 술렁였다. 

그의 컴백은 공중파 3사 저녁뉴스의 주요 기사로 다루어졌고, 모든 언론들은 앞다투어 그를 취재하는데 열을 올렸지만, 그는 컴백공연 전까지 철저하게 언론으로부터 숨었다.


서태지가 처음으로 대중앞에 모습을 들어낸건 그의 컴백공연과 이 이후 있었던 기자회견 이었다.

검정색 단발이었던 머리는 빨간 래게머리로 바뀌어 있었고, 아이들이 아닌 밴드가 뒤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서태지가 2000년 시도한 음악은 당시 대중음악계에서 들을 수 없었던..홍대의 인드클럽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Hard-Core성향의 PimpRock이었다.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단 한번도 주류로 나온적 없었고, 10대 IDOL그룹의 댄스음악만이 그 성공을 보장 받았던 주류가요계에서 비주류 중에 비주류인 Hard-Core로 돌아왔다는 건 혁명이었다.


이후 서태지는 그의 음악인생 중 가장 많은 공격과, 스캔들에 둘러쎃였다.


언제나 그랬듯 가장먼저 부딪히는 것은 언론이었다.

컴백 첫날부터 언론에서는 그들에게 모습을 들어내지 않은 점을 들어 '상업적인 신비주의'라는 말로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에서 우리나라만이 가질 수 있는 이 꼬리표는 활동기간 내내 따라다녔다.

이와 함께 초기 논란이 된 것 중 하나는, 서태지의 빨간래게머리였다.

당시만해 도, 래게머리나, 노란색 염색머리는 이미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방송에서 아무도 하지 않았던 빨간색 래게머리에 대해, 가장 보수성이 강한 KBS는 그 판단을 내리지 못했고, 홀로 서태지의 방송분에 관해서 흑백처리하는 정말 한편의 코미디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이마저도 결국 한달이 채 못되서 스스로 번복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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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절


6집은 전반적으로 아주 강력한 핌프록(Pimp Rock)이고, 미국에서는 Korn과 Limp bizkit이 이 장르를 통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덕분에 이 앨범은 발표되자마자 표절시비에 휘말렸다.

언론의 기사들은 서태지 표절? 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결국 내용은 그냥 비슷한 장르더라 라는 낚시 제목으로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이 의혹같지 않은 의혹은 많은 전문가들이 그들의 평론에서 표절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고 말했음에도, 해외 웹진의 평가에도, 표절의 당사자인 Korn과 Limp bizkit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에 의해 끊이지 않고 거론됐다. 서태지는 이 끝없는 소모전에 대해 한 공중파 방송의 공연에서 당당하게 '서태지 표절의혹"이라는 커다란 신문을 등뒤에 건채 공연을 했고, 그 신문위에 빨간 페인트를 뿌리는 것으로 그의 대답을 대신했다. (대한민국 연예계 전체에서 방송에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서태지 단 한사람 뿐 일것이다.)


10대들의 무분별한 서태지 욕하기.


HOT,젝스키스,조 성모,GOD.... 이들은 당시 10대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중가요의 전면에 있었던 idol들 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서태지가 활동했던 당시 유치원생이었으며, 서태지가 은퇴할때야 겨우 초등학생 이었던 이들을 지지기반으로 삼고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 10대들이 대중문화의 전면으로 나오면서, 수많은 문제점들이 제기 되었고, 이 문제들은 그들을 자신의 구매자로만 인식했던 기획사들과 그들이 내놓은 상품들에 의해 더욱 커졌다.  이 속에서 10대들은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성원하는 수준에서 내 가수가 아니면 적 이라는 왜곡된 사상으로 무장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사회의 모든 시선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가수가 아닌 잘 알지도 못하는 서태지라는 인물에게 편중이 되자, 서태지를 '적'으로 판단하고, 온라인상으로 무차별적인 욕을 하기 시작했다.

문화 대통령이라 불리우며, 90년대 대중문화를 선도했고, 2000년대의 문화에 그 영향을 주었던 그는 다시한번 대한민국에 안티(Anti)라는 문화를 만들고 말았다. 인터넷에선 서태지라는 이름의 기사아래 무분별한 악플들이 10대들에 의해 달렸고, 그 기류에 편승 대한민국 인터넷 역사상 처음으로 한 인물에 대한 안티 사이트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스스로 정당성과 논리를 갖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인터넷은 끝없는 잡설과 소모전으로 연일 뜨거웠다.

"난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신경쓸 생각이 없다. 어떤 방식으로 나를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던 그건 그들의 자유다."  -안티문화에 대한 한 신문의 인터뷰에서-



"문화 사기단" 의 문화사기.


2000년 서태지와 함꼐 가장 많은 관심을 갖었던 단체가 있다. "문화사기단"


당시 이른바 인디밴드들이 하던 비주류 장르인 Hard-Core 음악을 했던 서태지로 인해, 그동안 지하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못받던 비주류 음악인들에게 대중이 조금이나마 관심을 두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이 있었다. 이는 서태지 역시 바랬던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인디에서 그룹 노브레인을 중심으로 한 문화사기단이 반 서태지를 외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안티 서태지 사이트를 만들고, 서태지를 본딴 인형안에 순대를 넣어 찢는 퍼포먼스를 연출한 공연을 열면서, 언론에 알려졌고 이는 한때 뜨거운 감자로 대두되었다.

문 화사기단이 말하는 안티 서태지에 대한 주장은 "서태지가 기성의 상업적인 가요계를 대표하는 사람이며, 우리는 정현철이라는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서태지로 대표되는 현 가요계의 거대한 기업형 브랜드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다." 였다.

이들의 이 행동은 곧바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고, "서태지는 대중과의 치밀한 숨바꼭질로 저항마저 상품화했다. 그런 행태가 자유와 저항을 내세우는 인디 밴드를 분노케한다." 라는 문화일보의 사설 등 각 언론은 권력의 서태지 VS  저항의 인디 라는 구도로 몰고갔다. 하지만, 그 이면과 본질을 보면 사실 한편의 코미디였다.


당시 그들이 비판했던 그 상업성을 본다면 가장 이득을 본건 바로 자신들 이었다. 한창이던 서태지 논쟁에 끼어듬으로 해서, 언론과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고, 그들의 공연을 알렸다. 더 우스운건, 그 상업성이라는 걸 비판한 그들의 홍대 피드백 공연은, 반 서태지 공연당시 평소 5,000원이었던 입장권 가격을 8,000원으로 올림으로 해서 스스로 정당성을 잃어버렸다.


또한, 당시 문화 사기단의 주축이었던 노브레인과 황신혜밴드등이 주장하는 상업적 가요계에 대한 질타는 서태지 개인에게만 이어졌지, 단 한차례도 기성 가요계와 idol을 양산 수익을 창출하는 기획사에게 향한적이 없다는 사실은 이들의 행동이 단순한 코미디였음을 알게해준다.

결국 이 한편의 코미디에서 가장 큰 놀림을 당한쪽은, 아무런 반응도, 응대도 하지 않은 서태지가 아니라, 이들의 행동에 광분했던 서태지의 팬들과, 이 되지도 않는 광대놀음에 같이 춤을 춘 언론과 지식인을 자처하는 일부 평론가들 이었다.

잡설) 이당시 문화사기단으로 가장 많은 이목을 끌었던 노브레인과 황신혜밴드의 조윤석....

철저하게 상업성과 주류성을 배제한 배고픈 싸움만이 진정한 음악인이고 저항이라며 외치던 이들..

조윤석은 2년후 가장 상업적이고, 저항과 가장 동떨어진 정치판에 끼어들려고 했다.(마포구 구의원 출마-낙선) 그리고, 상업성과 마케팅을 경멸하고, 일본 락 페스티벌에서 일장기를 찢는 등 저항을 대표하던 노브레인은 2년 후 월드컵붐에 편승한 상업음반을 내고, 3년 후 영화에 출연, 1년 후 가장 상업적인 이미지메이킹 이준기와 광고 찍었다.


-Rock이란 저항의 동의어가 아니라 음악의 한 부분일 뿐이다. 왈츠가 기존의 무거운 소나타에 저항하며 나왔고, 댄스음악이 기존의 느릿한 Soul의 저항적 의미로, Hip-Hop은 백인사회에 대한 흑인의 불만에서 그 원류를 찾듯이 모든 음악은 그 뿌리로 가면, 기존의 무언가에 대해 그 저항적 의미로 파생되었다. 또한 저항의 방법론은 구석진 곳에서 가난하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한채 스스로는 저항한다고 자위하는 것이 정당한게 아니다. 통속화 된 그 잘못된 틀을 가장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화려하게 깨는 것 이것이 더 멋진 저항이다.-  

이재수의 난(亂) 상업성과의 싸움 그리고 저작권


2000년 초. 인터넷에서는 한 사람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모방한 배칠수의 음악탠트라는 인터넷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마치 지금의 고음불가처럼 노래를 지독히도 못부르는 음치가수 이재수였다. 그는 얼마 후 당시 신선한 표현으로 각광받던 딴지일보를 통해 일약 인터넷 스타로 떠오르더니 어느순간 TV 쇼프로그램의 단골 게스트가 되어있었고, 우퍼기획이란 거대 기획사와 계약을 맺었다.


우퍼기획은 국내 최초의 패러디앨범(?)이라는 타이틀로 앨범제작을 기획했고, 이 와중에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를 울트라면이야로 바꿔 부르겠다는 제의를 했다. 이에 서태지는 뻔한 상술적 이용이라는 판단에 거절을 했지만, 7월 발매된 "이란"이란 앨범에는 이미 발표된지 3년 이상이 지나 저작권 관리가 서태지에게서 음반저작권 협회로 넘어간 컴백홈이 컴배콤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실렸있었다. 뒤늦게 음반이 발매되고, 뮤직비디오까지 제작되어 시중에 나온 걸 알게된 서태지는 저작권 협회에 저작권 승인 여부를 확인했다. 이에 저작권 협회쪽에서 사전 승인을 해준적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 원 저작권자의 권리로 저작권의 사후승인 거부를 요청했고, 이 음반의 판매금지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낸 상태에서, 저작권 협회는 서태지의 사후승인 거부 요청에도 사후승인을 내줬다.


일이 여기까지 번지자, 우퍼라는 거대 기획사를 등지고 있는 이재수측의 "패러디"란 명분 대 서태지측의 정당한 패러디가 아닌 상술을 이용한 불법적 저작권의 침해 의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언론은 "패러디도 이해 못하는 속좁은 문화 대통령 서태지", "거대한 서태지와 힘없는 이재수의 싸움"등의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고, 여론은 "돈많고 힘있는 서태지가,  힘없는 신인가수가 한 패러디를 이해못하고 핍박한다"고 서태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재수측은 미국의 유명 패러디가수 얀코빅(Yankovic)의 예를 들며, 예술의 한 장르인 패러디에 저작권을 운운하는 서태지측을 비난했다.

이에 서태지측은 패러디는 이해하지만, 이재수의 컴배콤은 이재수가 말하는 얀코빅(Yankovic)의 패러디같이 원작과 또다른 매세지를 통해 하나의 다른 작품으로 인정받을 작품이 아니라, 단순히 원작자의 동의 없이 상업적 목적을 위해 원작을 회손한 저작권 침해라며 맞섰고, 저작권을 위임한 저저작권협회의 사전승인 없이 곡을 이용했으며, 서태지의 사후승인 거부에도 불구하고, 승인을 해준 저작권협회와 거대 기획사간의 정당치 않은 관행에 대해 시정을 요구했다.


법정에서 판결이 나기전까지 언론과 이재수측은 얀코빅(Yankovic) 패러디 문화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정착시키는걸 방해한 서태지로 그들의 여론몰이를 했다.  

결국 속좁은 문화대통령 서태지는 법원의 승소판결을 받아냈고, 싸구려 상업놀이에서 자신의 저작권을 지켜냈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패러디에 관한 저작권분쟁의 첫 판례로 이 후 싸구려 상술에 침혜 될 작가 고유의 저작권에 대한 정당한 권리행사를 지킬 수 있게된 시발점이다.  



얀코빅(Yankovic)은 1980년대부터 활동한 미국의 패러디 가수이자 희극인으로 마이클잭슨, 마돈나, Queen등의 명곡들을 패러디해 그레미상을 수상하는 등 패러디의 황제로 불리운다.

그의 패러디는 원곡에 충실하되, 원곡과는 전혀다른 매세지를 전달함으로써 유쾌함을 선사한다.

또한, 패러디에 관한 법률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동의없이 만들어도 되지만, 원작자에 대한 존중과 만약 있을지 모를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사전에 원작자의 동의를 얻고, 허락된 곡만을 패러디했다.


그의 대표작 중 마이클잭슨의 Beat It을 패러디한 Eat It을 보면, 원작의 내용에 충실하면서도, 가사를 보면, "어떻게 그렇게 야단법석 떠는 청년이 되었어, 캡틴 크런치도, 레이진 브랜도, 원치 않아. 흠, 다른 아이들이 일본에서 굶어죽는다는 것을 몰라?  그래, 먹어 그냥 먹어.... (중략)" 과같이 먹을것에 집착하는 우스운 모습을 당대 최고의 가수의 노래를 패러디해서 만들었다.

원작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누가봐도 이마를 치며 웃음지을 수 있는게 얀코빅(Yankovic)의 패러디다.

이 패러디에 대한 저작권 분쟁에 승리한 서태지는 이후 창작자의 저작권 관리를 소흘히한 저작권 협회에서 탈퇴를 했다.  




이 외에도, 울트라맨이야 뮤직비디오 로고 디자인의 일장기 관련 논쟁이 있었다. 또, 한국 가요계의 생방송 문화에서 구현할 수 없는 Hard Core Live의 사운드 문제로 사전녹화 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했고, 이로인해 한 가수에 대한 특혜라는 이유로 조성모라는 가수로 대표되는 GM기획사와 특혜논쟁이 벌어졌다. 또한 한 방송사의 편파보도로 인해 서태지의 팬들에 의해서 정정요구 및 해당 프로그램의 광고 중지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불과 3개월이라는 활동기간에 한 인물이 그렇게 까지 많은 공격과, 스캔들이 몰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서태지 자신에게나, 그의 팬들에게나 참 힘든 한해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조금씩 좋은 변화들과 문화들이 서태지와 그의 주변에서 일어났다.


공연문화의 변화


춤으로 대변되는 댄스음악과, 형광봉, 풍선을 흔들며 오빠를 외치는게 전부였던 공연문화가, 조금씩 바뀌어 갔다. 이런 모습과 전혀 다를게 없었던 서태지의 팬들은 그들 사이에서 서태지의 음악에 맞게 좀더 자유롭게 즐기자는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풍선과 경광등을 버리고, 흔들던 손수건을 손목에 채우고 헤드뱅잉,슬램등 인디씬에서 공연을 즐기는 그 자유롭고 열광적인 공연문화를 배워나갔다.

또한, 생소했던 핌프록(Pimp Rock)이란 장르에 대해서도 단순히 서태지가 하는 음악이니까 그냥 듣는다가 아니라, 팬들 스스로 그 음악에 대해 더 잘 알기위해 인디밴드들의 공연장 찾아다니고, 해외 밴드들의 음악을 찾아듣는 등 그야말로 대중음악의 진정한 주체자로써 능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러한 행동은 일회적인 바람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던간에 좁은 음악적 시야를 가지고 있었던 팬들에게는 좀 더 다양한 음악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Rock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하는 계기가 되었음에는 분명하다.


매니아의 시대


무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집중하고, 또 그것에 대해 좀 더 알기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매니아라고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그 변화만큼 한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옮겨다니는 현대 사회에서, 진정 한가지를 좋아하고, 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매니아적 모습은 바람직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인생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무엇무엇의 매니아란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기를 울트라맨이야와 그의 활동에서 보여주었다. ("난 100명의 팬보다 1명의 매니아를 원한다" -서태지-)


그리고, 과연 자칭 태지매니아라 부르는 수많은 이들중 과연 몇명이나, 서태지 하나만이 아닌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매니아적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의문이 들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 의도가 스며들지는 않았을까 생각한다.



8.큰 울림을 알리러

서태지 솔로 3집 (Seotaiji Solo III) -2004년 -------- 음반판매량 50만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Intro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2. Heffy End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3. Nothing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4. Victim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5. Db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6. Live Wire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7. 로보트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8. Down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9. 10월4일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10. F.M Business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11. Zero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12. Outro (작사/서태지,  작곡/서태지,  편곡/서태지)



2004년 1월 ..그는 다시 돌아왔다.

빨간 래게머리 대신, 펑키스타일의 자연스러운 머리. 그리고, 트레쉬 스타일의 편안한 옷차림...

데뷔 후 12년 동안 서태지는 늘 새로움으로 대중앞에 섰다. 그의 음악, 스타일, 패션...

2004년의 서태지 코드는 "감성"이었다.

2004년의 서태지.. 그것은 과거이지만, 과거가 아니다. 이미 지나버렸지만, 아직 진행중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때의 서태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이갸기 하도록 하자..



서태지 이미 이 시대의 신화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신화가 되고자 한 적은 없었다.


그는 단지, 음악이 좋았고, 새로움에 대한 도전을 즐겼고, 닫혀있는 꽉 막힌 현실을 열려했다. 그것이 "감성"이다. 그리고, 2004년 그의 모습은 어쩌면, 스스로에게 가장 솔직한 모습일 것이다.  

또한, 서태지가 음악에 담고자 했던 그 감성은 그시절 이미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서 사라져가고 있었던 소중한 보물이었다.


서태지 7집 앨범판매량 50만장. 2004년 판매량 1위, 2007년 현재 아직 1위..........

어느샌가 TV에서 음악을 듣기 힘들어졌고, 가수를 보기 힘들어 졌다. 길거리에선 레코드점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이시대의 10대들은 더이상 음악을 하는 가수를 좋아하는게 아니라, 음악을 한다고 하는 캐릭터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시대의 20대들은 음樂을 즐기는게 아니라 음學에 대해, 앝은 지식만을 논한다.

큰 울림을 알리러..........


서태지가 2004년 아니 그의 음악인생에 걸쳐 알리고자 했던 그 울림은 이제 사라져버린 감성처럼, 어느덧 우리의 가슴속에 그의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그 웅장함 만큼 울리질 않는다.

그건, 그의 음악이 가슴속을 울리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가  알리려 했던 그 감성의 울림이 이시대의 젊은이에게 전달되기에는, 이 시대의 문화가 너무나 매말라있기 때문이다.


서태지는 늘 "재미"라는 말을 곁에둔다.


"재미있을것 같아서.", "재미있으니까", "재미있는 음악을 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제 그 재미있는 이라는 말을 찾기에는 대한민국의 음악 문화는 더 이상 재미있지 않다.

앞 서 말했지만, 서태지는 스스로 신화가 되고자 한 적도, 문화대통령이 되고자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이 시대의 신화요, 문화대통령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지만, 큰 행동은 이 재미없는 대한민국의 음악문화를 바꿀 수 있다. 그건, 바로 남을 위해서도 아닌, 자신 스스로가 더 재미있게 음악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때문에 2004년의 서태지는 아직 ~ing다.  별거아닌 팬으로써의 바램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