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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성장

비폭력 대화에 대한 생각


[얘네들은 왜 이렇게 곧게 뻗고 싶었을까.. Joshuatree National Park, 2009  Eunice ]

NVC 과정과 함께 기적수업 스터디는 맞물려서 돌아간다. 점점 더 많은 책들을 보고 배울수록 그것들이 같은 종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할때 자각하지 못한채로 '나의 생각'이나 '선입견' 그에 따른 '해석'과 '판단'이라는 거름망을 통해 그 사건을 평가한다. 그리고 그것은 순식간에 불편하거나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감정'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저 신호 체계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NVC의 관점이다.  내 안에 있는 어떤 욕구가 충족이 되었는지 안되었는지에 따라서 우리는 그 신호체계를 관찰하거나 들여다 보기 보다 왜곡하게 된다. 그 느낌이 '좋다' '싫다'로 구분되면서 자신의 어떤 욕구가 충족되었는지 모른채 '신경 쓰인다' 라던가 '섭섭하다' 라던가 '화가난다' 라던가 '불편해하고 거북하고 언짢은 .. 어색한.. 찝찝한 등의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감정들을 먼저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신이 판단했기에 만들어낸 감정의 결과들이다.

왜냐하면 '감정'은 그저 내 욕구가 충족되었는지 안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체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감정'에 뒤덮여 자신도 보지 못한 자신이 충족하려는 욕구가 무엇인지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은 비디오를 찍는 과정이다. 그저 현실에서 디카나 캠이 일정한 시간을 녹음하고 영상을 기록해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나의 시각'이 아니라 제3자의 시각이 되는 것이다.

'관찰'이라는 것을 해본다 치면 너무 쉽게 '나의 시각'이 섞여 나간다.  이를테면 새벽2시에 들어온 남편은 '늦게 들어온' 배려심없는 남편이 되는 거고 학원간다고 한 아이가 피씨방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는데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학원에 다녀왔다'라고 말했을 때 그 아이는 '거짓말하는' 아이가 되어 배려받지 못하고 '신뢰'를 느끼고 싶었던 엄마는 학원 다녀왔다는 인사 한 마디에 급격히 화가나게 된다.

새벽 2시는 관찰이다. 카메라에 담긴 시계가 2시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학원을 간다고 말한 후에 피씨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역시 관찰이다. 비디오에 찍힌 그대로를 말하는 것은 모두 관찰이다. 하지만 새벽2시이건 12시이건 '늦은' 이라는 말을 섞어 기술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의 주관이다. 그것이 새벽 6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대사를 관찰하는 것은  엄마가 어제 나에게 '청소좀 해라~' 라고 했다고 관찰 비디오에 녹음된 음성만 사용해야 한다. 여기에는 또 쉽게 감정이나 나의 해석 또는 주관이 섞인다. 엄마는 매일 '청소좀 해라~' 라고 말한다고 기술한다거나 '또'라는 단어 같은 것들이 끼어든다거나 그 대사를 강조하기 위해(주관적인 해석으로) 상대가 한 말에 형용사 같은 것들을 덧붙이는 식이다. 관찰에는 '밍기적'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고 '늑장을 부린다'와 같은 기술도 관찰은 아니다. '더럽다'도 심지어 관찰이 아닐수 있다. '바지에 무엇이 묻은채로'가 관찰이 될 수 있겠지.

 계속 이렇게 관찰과 내 주관이 섞이는 이유는 아직 훈련이 잘 되지 않아서 이기도 하지만 이 생각들의 기본에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판단하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주관'이 섞인 단어들로 관찰을 기술하게 되는데 자신은 잘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옳고 너는 그르기'에 '나는 오로지 너 때문에 화가나'고 '오로지 잘못은 너에게 있다'는 생각이 상대방을 '틀린'곳에 가져다 놓는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상대방을 '피해자'로 만들거나 '죄책감'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대화에 있어서의 단절을 가져오는 이유는 '피해자'의 느낌이나 '죄책감'의 언어가 자신에게 전해지는 순간 상대의 뇌는 의도치 않게 '살기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시작한다.

첫날로 돌아가서.. '상대방을 고친적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왜 상대방을 고치려 하는걸까?
내가 맞고 상대가 틀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스스로 어떠한 토를 달지 않는다. 자신의 머리속에서는 자신이 100% 맞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타인이 잘못이고 잘못된 타인만이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으며 상대의 선택권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대가 반드시 내가 생각하는 결론을 내지 못하면 또다시 불편해한다.  상대가 약속을 했는데 약속을 취소했을 수도 있고 반드시 같이 해야만 하는 일인데 그가 하지 않음으로써 내게 그 일이 가중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자신이 생각하는.. 도덕적으로 해야할 일이나 지켜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옳다' '그르다'는 관점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되면 대화는 영영 단절이다.

그리고 이럴때 사람들이 가장 쉽게 해결하는 관계의 결론은 '거리두기'이다. 일명 '꼴 안보기'
그리고 그런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한 이런일은 살면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게 된다.

'누군가를 고쳐본 적이 있는가?' 라고 생각해보면 정말 최근에 나는 누군가를 고쳐 본 적이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도 결과도 아주 재미있게 느꼈다. 하지만 정말.... 내가 그 일을 통해서 많이 배운 것은 '내가 옳고 당신이 틀리다'라는 관점에서 상대를 대하지 않았고 '상대는 바뀔 필요가 전혀 없고' 상대는 그 자체로 완벽하다.. 라는 생각으로 부터 시작된 변화였다.  강요하지 않았고 '너는 이래야해'라는 일명 '해야만 한다~~~이기 때문에'라는 시각을 조금도 갖고 시작하지 앟았다. 오로지 그 존재의 장점만 바라보았고 그것을 수용했을 때 희한하게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누구를 고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반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설득한다'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판단에 의한 의도를 상대에게 요구하면서 상대를 대할때 상대는 역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자신을 대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공부좀 해'라는 말로 아이가 즐겁게 공부할 수 없는 상황처럼 강요당한 사람의 마음에는 불편함이 남게 된다. 겉으로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쳐진 것'이 아니다. 결국.   그리고 상대는 고쳐야할 무언가도 아니다. 내가 상대가 불편하다면 고쳐야 할 것은 오로지 상대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내 '마음'과 프로그래밍 된 나의 '뇌'안에서 무언가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감정이 그냥 저 사람이 이런말을 해서 짜증나~ 라던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아~ 라는 식의 '답답함'이 아니라 오로지.. 유일하게.. 나 자신이 원하는 어떤 충족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나 이외의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라는 거다.

답답하다/ 또는 /슬프다 외롭다/ 배려받지 못했다/ 라는 내 느낌의 원인을 밖에서 찾아 '너 때문에 화가나' 라고 말했을 때 대체 고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 하면 역시 자신의 욕구이다. 내 느낌과 충족되지 않은 욕구는 '너'에게서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오로지 외부의 자극일 뿐이다. 자신을 잘 들여다보지 못하면 자신이 어떤 충족되지 않은 욕구가 있는지 상대에게 말하기란 더욱 어렵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건 들여다 보는 것이 힘들거나 자존심 상하기 때문인 이유도 들어간다. 그리고 이런건 관계속에 긴장감을 낳고 스스로도 살면서 영원히 '짐'이 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의 뒤에는 우리 스스로 충족하려는 어떤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나는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 원인을 상대에게서 찾으려고 하며 상대에게서 찾으려고 할 때 나의 충족된 욕구를 말하기보다 상대를 비난하거나 단절된 대화를 하면서 상대에게 이해되지 않는 '감정'적인 소모를 하려 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스스로 지배하는 곳, 그 속에서는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 밀턴의 실낙원 -

최근에 크리슈나무르티의 잃어버린 자서전을 잃고 뜨악~~ (긍정적인 의미로)했는데 그는 이런 멋진 말을 남겼다.
" 평가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 인간 지성의 최고 형태이다 "


내가 왜 이런 멋진 것들을 배우고 깨닫고 있는 중인가 하면 나를 다시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살면서 내가 수용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수용하고 싶고 그것이 내 긴장감과 삶의 부정적인 에너지들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맞지 않는' 일명 '코드가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가 '대화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말을 잘하려고 했지만 대화를 잘 하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은 이제야 조금 알아가고 있다. 나 이외의 것들에서 변화는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보는 방식을 달리했을 때 모든 것이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그토록 많이 듣고 이해하면서도 '체험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우리는 하나다'와 같이 문맥상 이해했으나 '체험하지 못하'는 개념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을 체험하면서 행복을 느껴가는 과정중 인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만든 것이라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게 참... 멋진 세상이다.

- Eun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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