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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성장

비폭력대화 NVC1 - 관찰 -


[ 로빈훗으로 유명한 Nottingham의 Nottingham castle  2009  Eunice ]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러쉬아워의 사람들을 '관찰'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보는 가에 따라서 사람들이 안타까워 보이기도 하고 활기차 보이기도 하고 아무런 판단 없이 보인다는 것을 연습하다가 J.크리슈나무르티의 " 평가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 인간 지성의 최고 형태이다" 라는 말을 머리속에 재생시켜 본다.

정말. 그렇다. 신에 이르는 길은 결국 나를 바라보고 내게로 돌아오는 그 길과 같다. 내 머릿 속에서 이 사회구조 안에서 물들여진 많은 비판들이 남들에게 스스럼없이 가해지고 있는 나의 생각들을 바라본다. 판단은 잘못이 아니지만 판단하는 자신은 자신과 상대 모두에게 결과적으로 고통을 가져온다.  판단에는 '강요'가 따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강요를 하고 살았는지를 바라본다. ~해야만 한다/ 라는 말의 틀 안에 있는 강요 뿐 아니라 '~답지 않게' 또는 '~하지 않았다' 라는 부정어와 함께 상대를 말할때 조차도 우리는 공격성을 드러낸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인데  내 생각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 선생님은 교사답지 않게 행동한다. 라는 것은 '평가'이지 '관찰'이 아니다. ~답지 않다 ~같은 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그것은 역시 나의 '기준'이기 때문이기에 상대방에게 꼬리표를 붙이게 되는 것이다. 교사는 ~해야하지 않다.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교사는 이래야 한다'라는 기준은 나의 위치나 환경에 따라 절대적이지 않은 판단이 되기에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꼬리표 또한 아니다. 신나이에서 말하지 않는가. 선과 악, 옳고 그름은 없다고. 모든 것이 모든 존재가 '아름다움'이듯이 비폭력대화에서는 모든 욕구를 '아름답다'고 본다. 거기에는 꼬리표가 붙지 않는다.

지배구조 속에 살고 배워온 우리들은 우리가 '객관적'일 수 있다고 여기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라던가 '객관적으로'라는 말을 쓰는 것이 모두에게 합의된 어떤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얘기하지만 그런건 없다. 모두 '자신만'의 평가일 뿐이다.

선생님이 욕을 했다고 치자. 그리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 선생님은 교사답지 않게 행동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절대로. 하지만 '욕'이라는 것을 따져보자면....'이놈아' 가 누군가에게는 욕이 될 수도 있고 그 정도는 욕이 아닐 수도 있다. 미친~ xx 라고 했을때 욕이 되는 경우가 있고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냥 단어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래? 라고 할지 모르나 이렇게 사람은 자기의 위치성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지는 데다가 내 주변의 대개가 '이놈아'는 욕이 아니고 쌍시옷이 들어가야만 욕이라고 여긴다는 공통적 합의에 도달해 있다고 믿는 것 또한 자신이 주변을 보고 판단내린 일반화의 오류이다.

늦게 일어났다/ 역시 평가이다. 누군가에게 정오는 문안한 기상시간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 12시 기상자는 '게으름'의 꼬리표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동이가 거짓말했다/ 에서의 '거짓말' 또한 평가이다. 거짓말은 내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일 때를 말한다. 여기에 내 진실만 있을 뿐 그것은 100% 옳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매일' '매번' '항상' 같은 것들은 우리가 쉽게 쓰는 '평가'의 단어들이다. 우리의 상처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말은 쉽게 쓰여진다. 그리고 '누적된 관찰'의 결과 얻어졌다고 말하며 그것을 합리화한다. 실제 연습해 보면 쉽게 자주 툭~ 튀어나오게 되는 말이다. 그는 매번 지각했다. 라던가 그는 항상 그렇게 행동한다.... 라고 할때 우리가 24시간 그 사람을 관찰할 수 있었을까? 내가 볼때마다-->를 '매번' '매일'로 인식했을 따름이다. 우리가 그 사람을 본 것은 아주 '찰나'이다. 그 찰나가 여러번 반복 되었을 때 우리는 이런 말로 상대를 평가한다. 혹시 아는가. 내가 볼때만 그 사람이 그러고 있었던 건지.. ^^

우리 아들은 게으르다. 게으름에 대한 평가가 들어간다. --> 우리 아들은 오늘 12시에 일어났다. 가 관찰이다. 판단하는 것이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그런 잣대를 들이대지 않을 것 같으나 실제로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다보면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판단이나 도덕적 잣대도 무척이나 많고 빠르게 이루어진다.

@@ 관찰은 비디오 카메라로 찍히고 녹음되는 그대로를 묘사한다. 제 3자가 그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느낄지를 염두에 둔다. 관찰은 '비난'하려는 의도가 없으며 그 상황과 사람과 경험을 '과거'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구체적 '한 순간'을 말한다. 또한 '일반화' 하지 않는다. 이 관찰은 상대방과 '질적인 연결'이 되는 의사소통을 일단 '시작되도록' 돕는다. 비난이나 비판하려는 의도없이 사실에 대한 관찰을 이야기 함으로써 상대방이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동의하는 시점'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에겐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이 있는가를 한번 면밀히 따져보자.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우리에겐 우리의 '위치성'에 따른 사실이 있을 뿐이다.

생각, 평가, 판단, 비판이 따르게 되는 말들도 있다.

1. 나는 ~처럼 느낀다
2. 나는 마치~같이 느껴진다
3. 나는 내가 ~하다고 느껴진다

내가 무시당한 느낌이다. 나는 위협 당한 느낌이야. 네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어. 그 여자는 외톨이야. 등등
~처럼 ~같이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들어간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 하다고 느껴진다 역시 그 여자가 차갑다고 느껴져 라는 말처럼 그 사람에 대한 '비판'이 들어간다.

나는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려고 한다.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은 없다. 나의 진실이 타인에게 진실이 아닐수도 있다. 여기에서 내 평가나 비판이 상대에게 가해질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 해야만 한다라는 말이 뒤에 숨어서. 그리고 상대는 전혀... 그렇게 되어야만 필요도 이유도 없다. 왜 모든 사람이 내가 '그렇다'라고 생각하는 나의 진실처럼 살아야 하겠는가?  욕구는 어떤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행동을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내가 상대에게 '부탁할 수 있는 일'이 있을 수 있으나 내가 휴식이 필요하다고 상대가 입을 다물 필요는 없으며 내가 재미가 필요하다고 상대가 웃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책을 많이 본다고 상대도 많이 봐야만/// 하는 것이 절대 아니며 내가 존중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 생사가 나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말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주로 누군가를 보고 답답해 할때 내 마음안에서 상대가 어떻게 해야만 한다~~ 라는 것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폭력적으로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늘도둑과 소도둑은 다를까?
또 도둑질을 행하는 사람과 그것을 한번이라도 떠올려 본 사람은 다를까? 한 사람은 평민이고 한 사람은 도둑이 되는 걸까? 육체적인 폭력과 언어 폭력은 그 크기가 다를까? 어떤 하나가 더 참을만 하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의 꼬리표를 붙이고 그렇게 하지 않음을 말로 비추어 그 사람에게 '방어기제'가 작동하거나 불편한 느낌을 들게 한다면 그것은 언어폭력인가 아닌가?

생각해볼 일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상대가 꼭 나와 같지 않음을 축복해본다. 또한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 존재 자체가 가진 욕구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보았다. 상대에게 꼬리표를 붙이진 않았는지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상대를 보지는 않았는지 또 상대가 방어기제가 들도록 말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내가 옳다고 상대에게 얼마나 많은 강요아닌 강요를 했는가도 가만히 들여다 본다. 나는 지금만을 본다. 이제 과거를 보고 그것에 의미를 달지 않으려 한다. 존재의 선함과 사랑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