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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성장

기쁨과 쾌락 사이



            [ 날씨가 많이 풀린.. 멋진 봄날의 데이트는 Um~Um~Um..했다. ^^ 2011.04.01 Eunice ]




기쁨과 쾌락은 완전히 다르다. 쾌락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쾌락은 포함돼 있지 않되 엄청난 기쁨의 느낌과 행복의 느낌을 담고 있는 세계에서 살 수 있는지를 보자.

우리는 모두 이런저런 형태의 쾌락을 좇고 있다. 지적 감각적 또는 문화적 쾌락, 개선의 쾌락, 다른 사람에게 해야 할 것을 말하고 사회악을 고치고 좋은 일을 하는 쾌락, 더 많은 지식의 쾌락, 더 큰 물질적 만족, 더 많은 체험, 삶에 대한 더 많은 이해, 마음의 여러 똑똑하고 영악한 부분들..

쾌락은 사회의 구조이다.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은밀하게, 교모하게 또는 드러내놓고 쾌락을 좇는다. 그러므로 쾌락 형태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이 우리를 이끌거 우리의 삶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아주 명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 쾌락의 문제를 면밀히 조심스럽게, 섬세하게 탐구하는 일은 우리 각자에게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쾌락을 찾고 키우고 지속하는 일은 삶의 기본적인 욕구이며, 쾌락 없는 실존은 지루하고 우둔하고 외롭고 의미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삶이 쾌락에 이끌려서는 안되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쾌락이 반드시 고통, 좌절, 슬픔과 공포를 가져오고 공포는 폭력을 낳는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기는 하지만, 당신이 슬픔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쾌락의 전체 구조를 이해해야만 한다.

쾌락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쾌락을 비난하지 않고 나쁘다거나 좋다고 말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것을 추구한다면 눈을 뜨고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즉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은 반드시 그것의 그림자인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점을 알면서 추구하자는 얘기다. 우리가 아무리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고 해도, 그 둘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다.

그러면 왜 마음은 항상 쾌락을 요구할까? 왜 우리는 쾌락과 함께 일할까? 왜 우리는 쾌락의 가는 끈에 매달려서 희생하거나 괴로워 할까? 쾌락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해서 존재 속에 자리를 잡는가? 우리 중에 스스로 이 문제들을 묻고 끝까지 대답을 찾아보려고 한 사람이 있는가?

쾌락은 지각, 감각, 정복, 욕망이라는 네 단계를 거쳐 존재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가령 멋있는 자동차를 봤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그것을 보는 것에서 어떤 감각, 어떤 반응을 얻는다. 그래서 그것을 만져 보거나 만지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그것을 갖고 싶고, 타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기쁨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다음 순간 그것을 잊어버리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 마음이 찾아들어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즉 내 마음은 그것에 대해 거듭 생각하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았는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자꾸 보아야겠다고 혼자 생각한다. 생각은 비교하고 판단하기 시작하며 " 내일 다시 그걸 해야지"라고 말한다. 잠깐 동안 기쁨을 주었던 체험의 연속은 생각에 의해 계속된다.

그것은 성욕이나 또 다른 형태의 욕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반응하는 것은 정상이나 생각은 그 즐거움을 되씹어 보며 그것을 쾌락으로 만든다 생각은 그 체험을 되풀이하고자 하며, 그래서 되풀이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더 기계적으로 변한다 그것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은 쾌락을 부추긴다. 그러므로 생각은 욕망을 통해서 쾌락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며, 그 결과 어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은 생각에 의해 뒤틀리게 된다.

생각은 그것을 기억으로 만들며, 그 기억을 되풀이 생각함으로써 기억은 또다시 키워진다. 물론 기억은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날의 삶에서 기억 없이는 우리는 제구실을 다 할 수가 없다. 기억이 자신의 자리에서는 쓸모가 있지만 그것이 거의 필요없는 마음의 상태가 있다. 마음이 기억에 의해 불구가 되지 않아야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생각은 결코 새롭지 않다. 왜냐하면 생각은 기억, 체험, 지식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낡은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즐거움을 가지고 보고 잠깐 동안 엄청나게 느꼈던 것을 낡은 것으로 만든다. 당신은 낡은 것에서 쾌락을 끌어내지, 결코 새로운 것에서 끌어내지 않는다. 새로운 것 속에는 시간이란 없다.

쾌락을 반복하고자 하는 바로 그 요구는 고통을 가져오는데 그 이유는 그 쾌락이 어제의 그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점점 변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쾌락이 사라졌을 때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당신은 불안하고, 질투에 휩싸이고, 증오로 가득 찬다. 당신에게서 술이나 담배 또는 성이나 그 밖의 어떤 쾌락이 사라졌을 때 자신을 자세히 지켜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어떤 전장을 통과하는지 눈여겨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모두 같은 형태의 공포이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지녀오던 어떤 신앙이나 이데올로기가 논리나 삶에 의해 흔들리거나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갈 때, 당신은 혼자서 있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그 신념은 여러 해 동안 당신에게 만족과 쾌락을 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떠어져나갔을 때 당신은 궁지에 빠지고, 공허한 채로 남겨지며 그 공포는 당신이 다른 형태의 쾌락과 신념을 찾을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 Freedom from the known -

쾌락을 왜 갖게 되는지 어떨때 기쁨을 느끼는지 그리고 그것을 잃었을 때

내가 순식간에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화'에 휩싸여 있는지 지켜본 적이 있는가 ?

를 묻는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면밀하게 깨어 있는 의식으로 늘 관찰할 수 있는가..

그것이 되어지면 말이나 행동이 반 보 앞서서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대개 그런 내 안의 나를 볼때는 신기하게 잠잠해진다.

'관찰'을 최고의 지성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저 '바라보라'는

너무 흔한 그 말이 와 닿을 때가 있다.

'관찰'하고 있는 나에게 '평가'나 '생각'이 끼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부리기 위해서 ' 관찰'하는 나에게 다시 느낌이나 감정으로 넘어가

'생각'이 끼어들고 비판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들때 나는 그것을 가려낸다.

'생각'이 끼어 들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이것은 생각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면

즉시 다시 '관찰'로 돌아간다. 이것이 깨달음의 첫 단추.. 가 되었던 경험이다.


[Eun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