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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성장

깨달은 자 무엇을 할 것인가






깨달았다? 뭘 깨달아야 하고 뭘 깨닫고 싶은걸까?
그리고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뭘 알게된 걸까? 그리고 그걸 무엇으로 믿을 것인가?
아니 무엇으로 그렇다는 것을 알텐가?

자신이 없고 믿어야만 하는 일은 '믿으라'는 말과 '믿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깨달았다고 하면서 못 알아 먹는 말을 하고 있다면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까.
헛소리 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뭔가 이치를 알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이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뭘 깨달은 걸까.

수련을 하고 맨날 앉아 뭔가 하고 있는데 정신만 썼지 몸을 한번이라도 썼나.
생각으로는 우주로도 과거로도 미래로도 .. 못가는 데가 없는 건데
그래 머리는 굴렸는데 몸은 어쩔 것인가.

백날 수련이니 호흡이니 해봐야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해보면 내 간이 건강해 졌을까?
내 무릎팍에 힘이 조금이라도 더 생겼는가?
아주 아주 조금이라도 내 육체적 건강에 도움이 되었는가 생각해보자.

죽기전까지.. 죽어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기 전까지 정신이.. 내 영혼이 사는 집은 내 육체이다.
그 육체를 놀려먹지를 않아서 굳어지고 찌뿌둥하고 묵은 기운이 가득해져 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운동을 안하고 있는데 백날 머리 굴려 생각해봐야 그 영혼이 사는 집인 내 육체가 변하지 않는한 답이 없다.

깨달은 놈이 피골이 상접하다거나 몸이 골골댄다거나 그 몸이 뚱뚱한채로 남아있다면
깨달았다고 보여질까?  딴 사람에게 자기 깨달음을 자랑하거나 누군가를 가르키기 이전에 자기 현실 즉 자신의 육체의 현실 하나 보지 못하고 있으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딴 사람을 이롭게 하기 전에 자기 몸을 고쳐야지. 이치를 깨달은 놈은 자신의 몸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내 현실의 위치를 직시할 줄 알고 내 역할을 이해하게 된다.

견성과 성불은 무엇에다가 했을까.
자기 본성. 자신이 누구인지. 내 육체가 어떤지 직시하지도 못하고 내 몸하나 부리지 못하고 있는데 딴 걸 해봐야 그 육체에서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만큼 육체의 건강은 현실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이 내 정신과 내가 '내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뚱뚱한 놈은 도사가 될 수 없다. 말인즉슨, 자기몸을 고칠 줄 모르는 사람은 논문을 써봐야 '쓰기위한' 논문이 될 것이고

자기 자신의 몸은 자기밖에 봐줄 수가 없고 자기 자신밖에 놀릴 수가 없다. 예수도 부처도 그 누구도 내 무릎팍 아픈걸 느껴줄 수 없고 봐줄 수 없고 대신 먹어줄 수 없고 운동해줄 수가 없는 법.

그래서 모든 귀결점은 자기 자신에게로 온다. 뭘 하겠다는 사람이 .. 영혼이 거하는 집을 놀려먹지를 않아서 꾸덕꾸덕 살만 축적하고 묵은기운만 담아두고 있으면 뭘 하겠다는 것인지.
앉아서 수련할 시간에 교회가서 기도할 시간에 부처님께 절할 시간에 내 몸을 튼튼하게 하는 운동을 먼저 하는 게 좋다. 내 몸이 어디가 어떻게 좋은건지 안좋은건지도 모르고 있는데 세상과 인연을 끊으신 부처님께 절해봐야 그분덕에 일이 잘 풀렸다면 그건 부처가 아니요. 시주나 헌금을 많이했다고 그것 때문에 내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역시나 .. 1원 한장 받으면 부처가 아니요 하나님의 뜻도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시간에 내 몸을 '개운'하게 해야한다.

깨달은 자가 단체를 만들고 회비를 걷는 것은 누가 좋으라고 하는 것일지 생각해 봐야 한다.
'내 영혼'이 누구에게 끄달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 스승도 제자도 만들 필요가 없다. 깨달았으면 그런걸 할 필요가 없다. '각자'(=깨달은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홀로 거점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야 서로 부담이 가지 않고 편해진다. 그것이 단체도 아닌것이 더 큰 힘을 갖고 세상을 변화시킬 일을 하는 것이지 단체를 만들면 단체의 논리에 빠져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손해를 보면서 누군가에게 '권위'라는 것이 주어지게 된다. '권위'는 폭력에 기반한다. 조아리면 남아있고 반대하면 나가야 하는 것. 질서가 위아래로 만들어지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홍익인간 하려면 저부터 해야하고 그럴려면 단체를 만들 필요가 없다.
결국 깨닫게 되면 단체를 만들 이유도 필요도 없어지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행동이 의미 있었던 것 같다.

몸은 맨날 더럽히고.. 과식하고 안좋은 음식 먹고 운동은 안하고 손에는 마우스의 전자파만 쏴대고 있으면서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보자.

애매한 말 들으면서 되도 않는 머리만 굴리지 말고 그 시간에 내 관절에 힘이 생기도록 움직여주고 개운하게 해주고 내 더러워진 위장을 닦고 입맛을 바르게 만들면 그 육신에서 바른 힘이 나온다.

옷도 남을 위해 입는 세상이다. 남 좋으라고. 그래서 나는 넘 입는 옷에 신경쓰는 사람들이 어이가 없다. 옷은 편리하고 따뜻하게 보온하려고 입는 것. 자기 자신이 무엇보다도 편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몸의 '발전소'들인 장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보온'의 역할을 잘해줘야 한다.

일년에 버려지는 새 옷들이 인구수만큼이나 많은 현실에 덜덜 떨면서 남 좋으라고 옷을 입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손해를 입으면서 남 좋으라고 옷 입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추우면 더 입으면 되는데 열심히 떨고 있으면서 알다리로 다닌다. 남 좋으라고...

현실을 바라볼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함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음악'이나 '티비' '영화'같은 것과 함께한다. 절대로 '혼자서'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자기 자신으로서 가만히 있어보질 못했다는 것.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본 적도 없겠지만 그럴라 치면 그것이 너무 지루하거나 다른 더 중요한 일이 생각나 다른 일을 하게 된다.

그만큼 자신의 행동에 대해 모르고 자신에 대해 모른다. 자신이 그 말을 왜 하는지 조차 모르고 왜 화가 먼저 나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치를 알려면 '나'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깨닫는 것인데 깨달음은 밖에서만 구하려 한다.

더군다나 자꾸 누군가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아무도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끝까지 파고들지 않는다. 깨달은 어떤 분은 누가 가이드 해줬을까? J.C의 책을 읽다보면 문장사이에 가만히 ...'멈춤'의 순간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그가 '듣고있거나 이해하게'하기 보다는 '나를 들여다 보게' 말하기 때문이다.

실은 내가 그가 천재적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의 시작이요 끝인데 남의 지식으로만 살고 남의 말만 듣고 그것이 그렇다 생각하고 정말 내가 그런 것인지.. 깊이 있게 내 안에 들어가 나에게 질문하고 나를 들여다 보는 일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자유'를 원한다 고 말하고 '깨닫고'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은 원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 말해주길 기다릴 뿐이고 그가 자신을 똑부러지게 가이드해주기만을 바란다. 그래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방법을 모르고 자신의 생각을 낱낱이 행동을 조근조근 볼 생각을 하지 못한다.

마음은 내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 '부릴 수 있어야 한다'. 점차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즉시 내 시스템의 판도가 바뀌게 되는 것.

멈춰서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나의 말과 행동을 깊이있게 보게 된다. 그것으로부터 나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병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작은 것에 화내고 별 것도 아닌 일을 크게 만들고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른채 피상적으로 화를 내곤한다.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역시나 삶이 이기적으로 흘러가거나 여전히 폭력적인 인간으로서 밖에 살게 되지 않을까 싶다. 들여다 보는 일이 굉장히 놀라운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전혀 모르던 것이 내 안에 있었다 라는 것도 신기하지만 거창하게~ '깨닫다'까지도 아니고 자신을 통해서 세상을 그리고 모든 문제의 근원들을 이해하게 된 것 만으로도 어떤 영화보다도 재미있고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진진하다.

그게 바로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지고 드라마 영화에 전혀 흥미가 없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내 생각을 부릴줄 알고 궁극적으로 자유롭고 또한 내 몸을 부릴 줄 알고 내 몸을 내가 고칠 줄 알게 되어 '홍익인간'할 수 있는 여유로 세상을 살려고 한다. [Eun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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