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눈과 닫힌 입, MoMa in N.Y 2010.12 Eun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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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화가 나기 쉬워지는 상황이 생긴다. 하지만 '분노'에 대한 원인을 공부하면서 분노가 일으켜진 것이 아니라 '분노 하고 싶었던 자신'임을 기억하게 된다. 누군가 잘못해서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 벌주고 싶어 하는 자신'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지금 '사랑하려 하는 자신'을 기억하고 그런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면 벌하려는 마음보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앞서게 된다. 분노한 마음이 먼저 있었고 그 눈으로 그 마음으로 그 생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그 일 자체나 사건, 사람을 볼때 쉽게 분노와 '화'의 카드를 내게 된다. 역시나 나의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것에 대한 내 판단이 들어가는데 그것은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마음이 아닌 것이다.
자신이 정당하다면서 '벌주려' 하는 자신을 합리화 하는 것도 잘 인식할 수 없는 습관인데 역시나 '양심적인' 것을 바라는 것도 '도덕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러한 판단으로 무언가를 처벌하는데에 에너지를 쓰기보다 게다가 그것을 '의롭고 당연한 것'이라고 열폭하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보다 그 사람의 욕구에 >>공감<<으로 연결하는 것이 더 나은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지 않을까..
나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 그러나 분노가 정당한 상황도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생각 없이 무분별하게 환경을 오염시키는 경우를 보았을 때,
'의로운 분노' 가 필요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
내 대답은 이렇다.
'무책임한 행동이나 '양심적인 행동', '탐욕스런 사람', '도덕적인 사람' 같은 것이 있다는 사고방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만큼 이 지구상의 폭력을 부추긴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살인하고 강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에 대해 동의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주의를 집중하면 좀더 나은 방법으로 삶에 공헌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모든 분노는 삶을 소외시키고, 폭력을 유발하는 사고방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모든 분노의 핵심에는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노를 우리에게 충족되지 않은 욕구가 있고, 지금 이 욕구가 충족될 가능성이 낮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자명종으로 활용한다면, 분노는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분노를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욕구를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노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보다 다른 사람들을 처벌하는 데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의로운 분노'에 동참하는 대신, 나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욕구에 공감으로 연결하기를 권한다. 그렇게 하려면 다음과 같은 연습을 많이 거듭해야 할지도 모른다.
곧 " 나는 그 사람들이 ~했기 때문에 화가 난다"를 "나는 ~이 필요하기 때문에 화가난다"로 의식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나는 전에 위스콘신 주의 소년원 학생들을 만나면서 중요한 교훈을 한가지 배웠다.
나는 이틀 연속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코를 얻어 맞았다. 첫날에는 두 학생의 싸움을 말리다가 팔꿈치로 세게 코를 맞았다.
나는 매우 화가 났지만 그 학생을 때리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내가 자란 디트로이트 거리에서 나는 그보다 더 작은 일로도 분노했다.
둘째 날, 나는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코( 그렇기 때문에 더 아팠다)를 또 얻어맞았다. 하지만 전혀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그날 저녁 이 일을 깊이 생각하면서, 나는 첫날 내 코를 때린 아이에게 마음속에서 진작부터 "버릇없는 녀석"이라고 꼬리표를 달아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를 얻어맞기 전부터 내 머릿속에 있었던, 그에 대한 인상이 그러했다.
그의 팔꿈치가 내 코를 쳤을 때, 나는 더는 단순히 팔꿈치에 코를 맞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 저 밉살스러운 녀석이 이런 짓을 하다니!"
나는 두 번째 아이에 대해서는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불쌍한 아이"로 보았다 이 아이를 걱정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코가 더 아프고 피가 더 심하게 났어도 전혀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이보다 더 분명한 교훈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일로 나는, 분노를 만들어내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바로 내 머릿속에 있는 상대방의 이미지와 그의 행동에 대한 나의 해석임을 깨달았다.
- 마셜 B. 로젠버그 [비폭력 대화] -
" 그러나 분노가 정당한 상황도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생각 없이 무분별하게 환경을 오염시키는 경우를 보았을 때,
'의로운 분노' 가 필요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
내 대답은 이렇다.
'무책임한 행동이나 '양심적인 행동', '탐욕스런 사람', '도덕적인 사람' 같은 것이 있다는 사고방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만큼 이 지구상의 폭력을 부추긴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살인하고 강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에 대해 동의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주의를 집중하면 좀더 나은 방법으로 삶에 공헌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모든 분노는 삶을 소외시키고, 폭력을 유발하는 사고방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모든 분노의 핵심에는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노를 우리에게 충족되지 않은 욕구가 있고, 지금 이 욕구가 충족될 가능성이 낮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자명종으로 활용한다면, 분노는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분노를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욕구를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노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보다 다른 사람들을 처벌하는 데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의로운 분노'에 동참하는 대신, 나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욕구에 공감으로 연결하기를 권한다. 그렇게 하려면 다음과 같은 연습을 많이 거듭해야 할지도 모른다.
곧 " 나는 그 사람들이 ~했기 때문에 화가 난다"를 "나는 ~이 필요하기 때문에 화가난다"로 의식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나는 전에 위스콘신 주의 소년원 학생들을 만나면서 중요한 교훈을 한가지 배웠다.
나는 이틀 연속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코를 얻어 맞았다. 첫날에는 두 학생의 싸움을 말리다가 팔꿈치로 세게 코를 맞았다.
나는 매우 화가 났지만 그 학생을 때리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내가 자란 디트로이트 거리에서 나는 그보다 더 작은 일로도 분노했다.
둘째 날, 나는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코( 그렇기 때문에 더 아팠다)를 또 얻어맞았다. 하지만 전혀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그날 저녁 이 일을 깊이 생각하면서, 나는 첫날 내 코를 때린 아이에게 마음속에서 진작부터 "버릇없는 녀석"이라고 꼬리표를 달아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를 얻어맞기 전부터 내 머릿속에 있었던, 그에 대한 인상이 그러했다.
그의 팔꿈치가 내 코를 쳤을 때, 나는 더는 단순히 팔꿈치에 코를 맞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 저 밉살스러운 녀석이 이런 짓을 하다니!"
나는 두 번째 아이에 대해서는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불쌍한 아이"로 보았다 이 아이를 걱정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코가 더 아프고 피가 더 심하게 났어도 전혀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이보다 더 분명한 교훈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일로 나는, 분노를 만들어내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바로 내 머릿속에 있는 상대방의 이미지와 그의 행동에 대한 나의 해석임을 깨달았다.
- 마셜 B. 로젠버그 [비폭력 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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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화가 나기 쉬워지는 상황이 생긴다. 하지만 '분노'에 대한 원인을 공부하면서 분노가 일으켜진 것이 아니라 '분노 하고 싶었던 자신'임을 기억하게 된다. 누군가 잘못해서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 벌주고 싶어 하는 자신'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지금 '사랑하려 하는 자신'을 기억하고 그런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면 벌하려는 마음보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앞서게 된다. 분노한 마음이 먼저 있었고 그 눈으로 그 마음으로 그 생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그 일 자체나 사건, 사람을 볼때 쉽게 분노와 '화'의 카드를 내게 된다. 역시나 나의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것에 대한 내 판단이 들어가는데 그것은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마음이 아닌 것이다.
자신이 정당하다면서 '벌주려' 하는 자신을 합리화 하는 것도 잘 인식할 수 없는 습관인데 역시나 '양심적인' 것을 바라는 것도 '도덕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러한 판단으로 무언가를 처벌하는데에 에너지를 쓰기보다 게다가 그것을 '의롭고 당연한 것'이라고 열폭하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보다 그 사람의 욕구에 >>공감<<으로 연결하는 것이 더 나은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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